[역경의 열매] 김인문 (6) ‘빵점 남편’ 믿음 가진 후 조금씩 변화
“여보, 정신이 들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또 얼마 동안 깊은 잠에 빠졌었나 보다. 이번엔 또 며칠이었을까. 가냘프게 눈을 뜨자, 내 손을 꼭 쥐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괜찮아”라는 말을 그저 눈으로 대신했다. 아내 역시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게 언제였던가. 우리는 둘 다 김포 토박이로, 부모님끼리도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아내는 나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누가 먼저 좋아했다기보다 우리는 만나면 마냥 편했다. 즐겁게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저만치 흘러갔다.
1970년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날짜가 가물가물하다. 함박눈이 펑펑 내렸지만, 날은 따뜻했다. 그날 우리는 결혼했다. 당시 나는 서른두 살, 아내는 스물네 살이었다. 나이 차는 많이 났지만, 오히려 아내는 나보다 훨씬 생각이 깊었다. 바쁘게 촬영장을 오가느라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하는 내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아내는 일부러 영양식단을 짜서 도시락을 챙겨주곤 했다. 그 모습에 흠뻑 빠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을 펼치기엔 우리의 형편은 어려웠다. 결혼식 후 신혼여행도 동료 연기자인 고(故) 남성훈씨가 직접 운전해 북악스카이웨이를 한 바퀴 돈 게 전부였다. 이런 곳에 처음 와봤다며 눈이 휘둥그레져 창 밖을 보던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우리는 서울 창신동에 6평짜리 월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했던 시절, 아내는 나의 매니저요 코디 역할까지 했다. 오로지 연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아내는 두 아이 교육도 홀로 감당했다. 살면서 나는 아들의 친구 이름은 뭔지, 학교 선생님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몇 학년 몇 반인지조차 모르고 지냈다. 결과적으로 나는 빵점짜리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다. 연기 외에는 가족과 함께한 것이 없다.
한번은 초등학생이었던 두 아들과 함께 목욕탕을 가기로 약속했다. 며칠 전부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들, 그러나 방송 스케줄 때문에 결국 지키지 못했다. 아내가 남자아이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갔다는 이야기를 한참 후에 전했다. 그때 아내는 “아이들도 엄마와 목욕탕에 가니 민망해했다”며 “적어도 아이들과 한 약속은 꼭 지켜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 후에 아마 창경원에 갔던 것 같다. 곰곰 생각해 봐도 정말 가족과 함께 오붓하게 시간을 보낸 기억이 없다. 그런 우리 가족이 함께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신앙을 가지면서부터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만큼은 아내, 아이들과 함께했다.
아내와 두 아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옆에서 성경을 읽어주고, 찬송을 불러주며 나를 격려해 주고 있다. 끝까지 나를 믿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있기에 나는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요즘 꿈을 꾸는 게 하나 있다. 아내와 함께하는 멋진 여행을 구상 중이다. 내가 다시 건강하게 일어선다면, 성지순례를 꼭 떠나고 싶다. 내 삶의 동역자로 함께해 온 아내와 예수님, 그 제자들이 걸은 길을 따라가 본다는 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 아내와 손을 꼭 잡고 기도하면서 걷고 싶다. 주님께서 나에게 그런 기회를 주실는지….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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