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철기 (10) 냉전기 국제외교 중심에서 담대하게 행동
외교관이 되면서 유엔에서 일하기를 꿈꿨다. 3년 고국 근무를 마치자 유엔대표부로 발령이 났다. 중간에 인사 문제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꿈만 같았다. 당시는 한국이 유엔에 가입하기 전이라 우리는 옵서버 대표부였다. 옵서버는 정회원들이 일하는 것을 보기만 한다. 유엔 무대에서 한국 문제를 주제로 토의하는 자리에 초대받지 않는 한 어떠한 발언도 할 수 없었다.
남북한 대표단은 교황청 대표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앉아 아는 체 모르는 체하며 만났다. 다른 국가 대표들의 한반도 관련 발언을 체크하곤 했다. 임시 외교부 대선배들은 유엔 근무를 의미 있게 보내려면 유엔 구석구석을 신발이 닳도록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다들 열심히 일했다.
유엔은 매일 기자들에 대한 정례 브리핑 직후 대표부 공관원들에게 이를 전해주는 정오 브리핑이 있었다. 12시 시작이라 점심 식사에 지장이 있었지만 나는 이 일을 인계 받아 유엔 동정을 수집해 보고하곤 했다. 그러다가 1983년 9월 1일 KAL 007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사건이 벌어졌다. 269명이나 희생된 긴급 상황이었고 이 문제는 한국과 소련만이 아닌 냉전 최대의 이슈가 됐다.
9월 3일 긴급 안보리가 소집됐고 대표부는 김경원 대사 주재 하에 야간 긴급회의를 갖고 안보리 대책을 협의했다. 수일간에 걸친 안보리 회의에는 국제 미디어가 총출동하는 등 관심이 집중됐다. 김 대사의 발언을 필두로 소련의 만행을 규탄했고 관련 결의안 채택을 위해 치열한 국제 교섭을 벌였다. 안보리 투표에서 소련의 거부권이 행사됐지만 9표의 기본표를 얻은 것은 당시 자유 진영의 승리였다.
유엔총회 기간 중 이범석 당시 외무부 장관이 뉴욕에 도착했다. 그가 유엔회의장을 떠날 때 마침 북한 한시해 대사가 옆에 있었다. 그는 한 대사에게 인사말을 전했다. 한 대사는 피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을까. 10월 9일 대통령 일행의 버마 테러 사건의 비보가 전해졌다. 쓰게 웃던 이 장관의 모습이 생생했다. 비통한 일이었다.
그 무렵 쿠바에서 77그룹 경제협력회의가 예정돼 있었다. 77그룹 회원국인 한국은 회의가 적성국인 쿠바에서 열린 까닭에 누군가 반드시 가야 했다. 버마 사태로 고위급 외교관들은 움직일 수 없어 경제위원회 담당이던 내가 수석대표로 가게 됐다.
회의 첫날 우리를 본 북한대사관 김모 참사관은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옆으로 끌고 갔다. 그는 “여기가 어딘데 어떻게 왔어.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걸” 하며 위협했다. 나는 의연히 대했다. 그리고 평소 가까웠던 유엔사무국 직원에게 적절한 보호를 요청했다. 주최 측인 쿠바 국립은행 간부들에게도 북한 측 행태를 지적하고 마땅한 보호를 요청했다. 우리는 저녁 호텔 방문 앞에 소파를 붙여 막아 놓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밤에는 이상한 전화를 받기도 했다. 다음날부터는 아무 일 없었다.
떠나기 전날 열린 쿠바 측 초청 전송 파티는 고궁에서 열렸다. 북한 측 사람도 여럿 왔다. 그중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자신을 격술요원이라 소개한 그는 나를 남조선 경제꾼으로 불렀다. 우리는 통일, 민족 문제 등을 이야기했다.
해외를 다니면 북한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잦다. 대개 대결의 장소였다. 그러다 제법 깊은 이야기도 나누게 된다. 한민족이기 때문이다. 위험한 순간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알기에 담대히 행할 수 있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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