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샤바즈 바티 장관!

Է:2011-03-03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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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샤바즈 바티 장관!

바티 장관, 당신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10월 7일 저녁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에서였습니다. 검은 콧수염과 검붉은 얼굴이 인상적이었죠. 호텔 룸으로 들어서자 반갑게 맞아주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빨간 넥타이를 매고 계셨지요. 저는 오늘 당신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검은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평화를 누리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알기로 당신은 그날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습니다. 오전부터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수상하는 명예박사 학위(리더십) 수여식에 참석해야 했고 기타 다양한 행사에 참석했었지요. 학위 받은 소감을 물었을 때, “특권이자 기쁨이다. 학위를 받은 것을 계기로 더 강해져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섬기겠다”고 했죠.

당신과 40분 가량의 만남은 개인적으로는 도전과 확신,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20여 년 전부터 소수민족 인권 향상과 종교 평등을 위해 싸워왔다는 당신에게 전사의 모습보다는 온화한 선생님의 모습을 느꼈던 것은 이 때문일까요.

제가 알기로 파키스탄 기독교인은 소수자인 데다 보이지 않는 카스트제도의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그런 차별 속에 살아왔을 텐데도 제 앞에서 한 번도 주류 파키스탄 사람에 대한 원망이나 공격적인 언급은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왜 파키스탄 무슬림은 교회와 크리스천을 공격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당신은 제 질문이 틀렸다고 수정해 주었습니다. “무슬림이 공격한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무슬림이 공격한 것이 아니라 테러리즘과 폭력의 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뿐 아니라 모스크와 타종교 예배당도 공격합니다. 종교적 자유와 인권,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과격한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모두 적입니다. 나는 바로 그런 폭력과 싸웁니다.”

그때 당신이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라고 일반화하는 위험성에 대해 지적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심각한 오해 속에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예수님께서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눅 10:27),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눅 6:27)고 하셨는데도 왜 무슬림에 대해서는 이 말씀이 성경에 없는 것처럼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만큼 우리 사회에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크기 때문인가요.

당신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테러리스트에 대해 매우 단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슬람이라는 이름으로 외부 세계에 알려지는 것 역시 우려했었고요.

“테러리즘의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외부 세계에는 이슬람 정파의 이름으로 전해집니다. 이 때문에 종교간 갈등으로 비춰집니다. 폭력과 테러리즘의 철학을 가진 사람들의 대표는 알카에다와 탈레반입니다. 무슬림들도 그들을 싫어하며 그들은 이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파키스탄 정부는 수년 전부터 이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이 이슬람의 이름을 이용해 폭력을 자행하는 이 폭도들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알카에다와 탈레반은 인류의 적입니다. 그들은 파키스탄의 안전,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 파키스탄 군인 5000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종교도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또 다른 이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과 무슬림, 평화와 조화를 바라는 모든 사람을 위협합니다.”

안타깝게도 당신은 결국 그런 폭력의 철학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 신변 위협을 느껴 방탄 차량을 정부에 건의한 것으로 들었습니다만 수용되지 않았지요. 파키스탄 정부 역시 폭력을 방관하고 있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20년 이상 어려움 속에서 지내왔다고 말했고, 종교적 자유와 소수 민족의 억압에 항거하는 일을 하면서 무수한 반대와 공격에 시달렸다고 했었지요.

당신의 고난을 제가 어떻게 감히 느낄 수 있겠습니까. 당신 고난의 무게를 어찌 저 같은 사람이 알 수 있을까요. 그저 당신의 말을 듣는 것, 그리고 수긍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 크리스천은 낮은 지위에 있고 당신 역시 그랬지만 2년 전에 장관이 됐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을 했지요. 또 파키스탄 크리스천의 지위 역시 전과 다르게 향상되고 있다고 하면서 정부와 지자체 등 공무원의 5%를 소수민족에게 할당된 것에 대해 기뻐했습니다.

돕는 친구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지요. 그들의 은혜를 입고 있다고, 난 혼자가 아니라고요. 파키스탄 크리스천과 소수 민족들이 모두 나의 힘이자 친구라고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나도 친구할 게요’ 하고 속으로 말했답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당신과 동갑내기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하늘에 있는 샤바즈, 좀 늦었지만 정식으로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 친구합시다.”

당신은 크리스천으로서 긴장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도 말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요.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고 그의 생명을 내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용서라는 명징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수많은 폭력에 대한 답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종교나 출신 배경 등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입니다.”

당신은 그날 저에게 그리스도인의 확실한 정체성도 심어주었습니다. 당신이 그랬지요. 크리스천을 '예수를 따르는 사람'(Follower of Jesus)으로 정의하고 싶다고요.

그날 당신과 헤어진 이후 트위터와 페이스북 종교 프로필을 수정했습니다. ‘기독교’에서 ‘Follower of Jesus’라고요. 하긴 신약성경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은 두 번 나오고 ‘제자’라는 말은 훨씬 더 많이 나온다지요. 제 기독교 정체성을 명확하게 해준 당신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당신의 장례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달 세상을 떠났던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천국에 계시겠지요. 어린 시절 당신의 손을 잡고 교회로 향했던 그 아빠와 만나 행복하시길 빕니다.

당신은 영원한 시간 속에서 순간일 만큼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들려준 당신의 말을 다시 기억하며 마음에 새겨봅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떠한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귀함을 누리며 조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특히 파키스탄 내 소수민족과 크리스천들이 동등한 권리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테러리스트가 더 이상 파키스탄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전해져 예수의 사랑과 열정을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만나면 더 이상 그 어떤 사상과 종교도 따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의미있게 만듭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모든 폭력과 편협을 몰아냅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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