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철기 (2) 신앙 굳건한 부모님 밑에서 믿음 쌓아
나는 1946년 이북 원산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명사십리 바로 옆에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주병온은 함흥 출신이었고, 공부를 잘해 집안의 희망이었다. 평양의 평의중학을 다니실 때 큰아버지 한 분이 같이 가셔서 물장수를 하면서 아버님 학비를 댔다. 어머니는 흥남 출신으로 일찍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다. 손위 누님을 일찍 여의면서 어머니는 다음 아기가 잘 자라면 목회자로 키울 것을 기도했고 나는 원산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북한 상황이 변해 아버지가 먼저 남쪽으로 피신하셨다. 이후 어머니는 형과 세 살 난 나를 끌고 갓난 동생을 업고 임진강을 건너 월남했다. 남쪽에서 아버지를 찾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는 동생을 등에 업고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나를 오른손으로 끌고 형은 쌀자루를 메고 걷는 피란민이었다.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무너진 동회 건물 안내판에서 아버지가 남긴 주소를 찾아다녔다. 결국 충청도 어느 절 마당에서 “아버지” 하고 부를 때 아버지께서 문을 여시던 장면은 지금도 영화처럼 떠오른다.
우리는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피란생활을 했다. 무너진 집에 머물면서 쇠고기무국을 국군이 나누어주어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국군 사망자의 시체를 많이 봤는데 결혼한 이후에도 한동안 자다가 전투하는 꿈을 꾸며 진땀을 흘렸다. 6형제 중 나만 키가 작은 편인데, 6·25 전쟁 때 어린 나이에 수천리를 걸어 다녀서 그렇다는 말을 어른들로부터 듣곤 했다.
부모님은 강원도 원주에 정착해 천일사라는 잡화점을 하며 당시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외가 친척들은 흥남 철수 작전 시 모두 배를 타고 나와 거제도 수용소로 갔다. 외가 역시 모두 원주에서 터전을 닦았다.
친가 쪽은 대부분 서울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신 일이 없는 온화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외가 어른들과 함께 원주에 야학을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성화여중고를 창설해 이사장을 지내셨다. 교회에서는 집사로 섬겼는데 어머니의 강력한 교회 봉사를 늘 조용히 도와주셨다. 당시 우리는 원주제일장로교회에 출석했다. 어머니를 따라 새벽기도에 나갔고 주일학교에서 찬양과 성경을 배웠다.
어렸을 때 당시 세계 장로교 분리에 따라 교회도 둘로 분리되는 아픔을 겪었다. 보수 신앙을 따른 부모님은 신앙 노선을 같이한 사역자 및 성도들과 함께 나와 우리 집 별채에서 교회를 새로 시작했다. 원주중부장로교회였다. 이후 집 앞에 교회를 새로 건축했고 집은 교회 마당처럼 쓰였다. 집에 큰 솥을 몇 개씩이나 걸어놓고 애찬 행사 등에 항상 사용했다.
어머니는 중보기도와 봉사와 헌금으로 교회를 성심으로 섬겼다. 신학생들의 학업도 많이 도운 것으로 안다. 어머니를 따라 심방도 가고 크리스마스 새벽송도 도는 등 순전한 어린 시절 신앙생활을 했다. 행복했다. 전쟁 통에서도 가족이 다시 만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좋은 교회와 물질적 안정을 주셨던 것들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어찌 우리 가족뿐이었겠는가? 민족의 시련 속에 수많은 실향민이 있었다. 그들은 남한에서 새 출발을 했고 강한 의지로 재기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가 원주의 성냥공장을 인수했는데 사업이 확장되면서 어려움이 따랐다. 게다가 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게 된 이모부와의 불화도 시작됐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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