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기억하는 전쟁, 그리고 그 후…

Է:2010-08-12 17:57
ϱ
ũ
일본이 기억하는 전쟁, 그리고 그 후…

쇼와사/전2권/한도 가즈토시/루비박스

쇼와(昭和) 20년(1945년) 8월 15일, 한낮에 있었던 일왕의 항복방송을 통해 태평양 전쟁은 일단 종결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이 항복을 하겠다고 전 세계에 알린 건 8월 14일이었다. 필리핀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일본 작가 오오카는 소설 ‘포로기’에서 미군이 14일 밤 시끌벅적하게 승리를 축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가 우치다 핫켄(당시 56세)은 “천황폐하의 목소리는 녹음된 것이었는데 전쟁을 종결한다는 조서다.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이 쏟아지는 눈물이 대체 무슨 눈물인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고 적었다. 작가 히로쓰 가즈오(당시 53세) 역시 눈물을 흘렸다. “전쟁 중이라 고장난 라디오를 고칠 수가 없었다. 소리가 작아 듣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내 눈물은 수돗물을 틀어놓은 것처럼 한없이 흘러내려 멈출 수가 없었다.” 그날, 일본 열도는 1억명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었다. 일본 히로히토 일왕시대의 연호를 딴 ‘쇼와사(1926∼1989)’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1억 인구가 눈물바다를 이룬 8월 15일 일본의 패전일에 집중되어 있다.

작가이자 일본 ‘문예춘추’ 편집장과 사장을 역임한 한도 가즈토시가 집필한 ‘쇼와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불쾌하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면해 온 일본의 근현대사를 정면으로 맞서게 한다. 게다가 부제 ‘일본이 말하는 일본 제국사’답게 8·15 당시 15살 중학교 3학년이던 저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미시사적 접근과 성장 이후 일본의 지성으로 활동하며 바라본 거시사가 교차하는 문체적 특징은 읽는 맛을 배가시킨다.

맥아더가 일본에 첫 발을 디딘 장면은 이렇게 묘사된다. “(8월)30일 마닐라에서 날아온 맥아더가 오후 2시, 아쓰키 비행장에 착륙하여 일본 본토에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넉넉하게 펑퍼짐한 허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담배 파이프를 손에 들고 유유히 내려왔습니다. 점령군의 총사령관이 주위에 호위병도 붙이지 않고 단신으로 내려와 침착하게 신문기자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요.”

그러나 맥아더는 요코하마의 한 호텔에 여장을 푼 뒤 일주일동안 방에 틀어박힌 채 두문불출했다. 드디어 9월 8일 도쿄 궁성 앞에서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도쿄진주식을 가진 그는 제국 호텔의 지배인에게 점심시간 1시간동안 도쿄를 안내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궁성을 둘러싼 물가에 고요하게 새가 앉아 있는 걸 내려다봤는데 지배인이 ‘일본인은 이런 평화로운 풍경을 좋아한다’고 하자 맥아더는 ‘나 역시 평화를 좋아한다네’라고 답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일본 정부는 ‘맥아더가 궁성을 점령하려는 마음은 없겠구나’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패전 직후 히로히토 일왕은 전쟁의 책임을 지고 퇴위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비록 형식적이지만 보위를 유지했다.

일왕은 9월 29일 미국 대사관으로 맥아더를 방문했다. 이날 이래 두 사람은 모두 11차례의 회담을 갖는다. 그러나 이들 회담의 내용은 지금까지 한번도 정식 공표되지 않았다. 다만 황태자의 가정교사였던 바이닝 부인이 궁성에서 전해들은 내용을 토대로 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맥아더: 전쟁 책임을 질 것인가? 일왕: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할 이야기가 있다. 맥아더: 좋다. 말하라. 일왕: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하건 상관없다. 나는 다 받아들이겠다. 나를 교수형에 처해도 상관없다(You may hang me).”

맥아더는 ‘나를 교수형에 처해도 상관없다’는 말을 듣고 일왕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일왕의 태도가 맥아더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형식적이나마 ‘천황제’라는 국체를 지키는 데 성공하나, 연합국의 뜻에 따라 미국이 쥐어준 초안대로 신헌법(현재의 평화헌법 제9조를 포함)을 공표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시끄러운 문제를 남기게 된다. 이후 냉전이라는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일본은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택해 지금의 일본의 형태로 향해 간다.

저자는 일본이 고도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 한국전쟁으로 인한 특별수요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전후 일본인들은 극도의 가난을 겪으며 ‘1000만 아사자’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다. 연합국의 점령정책에 의해 대기업이 해체되고 산업의 제재를 받으며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던 당시 일본의 상황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완전히 달라진다. 유엔군의 전진보급기지가 되어 단번에 모든 물자의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이때 일본인은 미국의 엄격한 기준에 맞추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동시에 대량생산방식과 품질관리를 습득했다. 그 결과 3년의 한국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경제가 완전히 회복되고 규모도 크게 확대되어, 그 흐름을 타고 발전을 거듭하여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도요타, 혼다, 소니 등 일본 대표기업의 토대도 이때 이루어졌다. 당시 ‘문예춘추’의 기자였던 저자는 혼다 사장을 인터뷰한 후 감사의 표시로 주식을 받을 뻔 했는데, 나중에 다시 만난 자리에서 주식이 몇 백배나 뛰었다는 사실을 듣게 된 이야기도 재미있다. 이런 에피소드는 약방의 감초일 뿐, ‘쇼와사’는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게 된 배경에서부터 전쟁이 전개되는 양상, 패전 후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 변화, 나아가 일상생활의 변화까지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
Ŭ! ̳?
Ϻ IJ о
õ
Ϻ 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