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데, 산의 형태와 주조색이 완전히 다르다. 한 사람은 산이 구릉처럼 낮고 부드러운 충청도 온양을 고향으로 둔 재독 여성 작가 윤종숙(60), 또 한 사람은 산세가 험하기로 소문난 함경도 실향민 출신 작고 작가 김종휘(1928∼2001)이다. 통과한 시대가 다르고, 무엇보다 살았던 지역이 대척점에 자리한 만큼 각기 ‘온화한 남방 산수’, ‘험준한 북방 산수’처럼 전혀 다른 산 그림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리안갤러리 서울점에서 하는 윤종숙 개인전 ‘봄(Bom)’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화사한 색상이다. 노랑 분홍 연두 초록 등 봄이면 다투듯 우리 주변을 채우는 꽃, 나무, 들의 색으로 가득 차 있다.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해 화면을 추상적으로 밀어가지만 누구라도 하늘, 구름, 언덕, 산, 오솔길 등 봄의 산 풍경을 유추할 수 있다. 윤종숙이 묘사한 산은 소처럼 길게 누운 언덕이거나 엄마의 젖가슴처럼 봉긋한 ‘∩’형이다. 화사한 색면에는 붓질의 흔적이 그대로 있다. 그래서 아련한 그리움이 화면에 번지는 것 같다.
‘봄의 산(Spring Mountain)’을 보자. 희게 난 길 옆으로 밭들이 펼쳐지고 멀리 나지막한 산이 있다. 길의 왼쪽에는 진달래를 연상시키는 연한 분홍색이, 오른쪽에는 개나리를 연상시키는 샛노란 색이 흐드러졌다. ‘백제의 땅’ 온양의 고향 산은 1960~70년대 산업화 시대에 유년기를 보냈던 작가에게 이렇게 마음을 데우는 서정적인 색면의 반구상 형태로 표현된다.
윤종숙은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뒤 미술강사를 고용해 미술학원을 운영했다. 어느 날 서울 워커힐미술관에서 본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거꾸로 그림’, 로즈마리 트로켈의 양털을 이용한 ‘편물 회화’를 봤다.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실을 이용해 캔버스에 바느질하는 작업을 했다. 영국 첼시예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하며 유화 작업으로 전환했고, 현재는 추상적인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산 그림은 봄이면 진달래꽃이 피어 분홍으로 물들었던 고향의 산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됐다. 최근 개막에 맞춰 방한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몸은 독일에 있지만 기억을 더듬으면서 작업을 합니다. 제 머릿속,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그 기억들을요.”
그는 한국 전시 준비 중 미국 유명 갤러리이자 피에르 위그 등 거장이 소속된 뉴욕 마리안굿맨 갤러리의 전속 작가가 됐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6월 28일까지.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복포리에 들어선 신생 복합공간 ‘가회60’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친 실향민 작가 김종휘의 전혀 다른 산 그림을 만날 수 있다. 그가 청소년기를 보낸 함경남도 신흥군 원평면은 전형적인 내륙산악 마을이다. 해발 1400m 천불산, 1200m 마안산 등 험준한 산이 주변을 에워쌌다. 높고 낮은 산들이 근경에서 원경으로 연달아 이어진다. 근경의 산은 삼각형의 형태로 산의 윤곽 부분을 진하게 그리고, 원경의 산은 아득하게 이어지는 작은 삼각형으로 그리는 방식에서 평양의 고구려 고분 벽화 ‘강서대묘’의 산 표현이 연상 된다.
산과 산 사이에는 동네 풍경이 펼쳐진다. 옹기종기 엎드린 초가집마다 나무가 있다. 사람이 없는데도 두런두런 사람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동네의 모습을 그리는 방식은 조선시대 안견의 ‘몽유도원도’ 속 이상향 복숭아꽃 핀 마을 풍경의 전통에 닿아있다. 산과 동네가 있는 이런 산 풍경화 양식은 1977년 50대에 접어들며 시도하기 시작해 브랜드가 된 ‘향리(鄕里,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연작으로 다양하게 변주됐다. 먼 곳의 마을은 구름 속에 가려져 있고, 구름 위로는 빨간 해가 떠오른다. 향리 연작은 기억을 더듬은 구체적인 풍경이면서 동시에 이상향으로서의 풍경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는 경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을 들뜨게 한 금광사업에 참여하면서 온 가족이 함경도로 이주했고, 작가도 그곳에서 스무 살 무렵까지 보냈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월남했다. 청소년 시절 땔감용 나무를 베러 올라간 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산악 동네 풍경이 고향에 대한 기억의 원형이 됐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화가가 된 김종휘는 초기에는 해방 이후의 유행처럼 추상화를 했지만 70년대 중반부터 구상으로 돌아섰다. 80년대를 전후해 메이저 화랑인 현대화랑, 동산방 등에서 개인전을 가지며 전성기를 보냈다. 이경성 관장의 눈에 들어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작품이 소장됐다. 언론에는 “황갈색을 주조로 한 ‘산’ 작업으로 일관하는 ‘서양화 산수 작가’”로 소개됐다. 실향민의 상실감과 함께 전후의 척박했던 시대를 통과해야 했던 정서가 황갈색의 어두운 주조색을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한국미술계에서 90년대 이후 추상 미술 단색화가 지속적으로 주류로 호출됐다. 구상 미술을 하는 김종휘는 자연스레 주변으로 밀려났다. 2001년 폐암으로 타계하며 더 잊힌 작가가 됐다. 미술계는 코로나 이후 추상화 피로증이 심해지고 있다. 아울러 K-컬처가 국제무대에서 주목받으면서 한국의 전통이 부각된다. 토속적인 산수화에서 영감을 얻은 ‘서양화 산수 작가’ 김종휘가 새삼 눈길을 끄는 이유다. 9월 30일까지.
서울·양평=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