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왕실문화는 K컬처의 뿌리… 글로벌 뮤지엄 도약 꿈꿔”

입력 2024-11-22 04:40
정용재 국립고궁박물관장이 1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가진 뒤 상설전시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상설전시실은 10년 만에 개편을 마무리하고 이날 외부에 모습을 공개했다. 이한형 기자

정용재(51) 국립고궁박물관장은 사학과·미술사학과 등 인문사회계가 주름 잡는 국가유산 분야에서 드물게 생물학을 전공한 이과 출신으로 박물관 수장이 돼 화제가 됐다.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연구직으로 시작해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문화유산위원회 위원 등을 지낸 그는 문화유산 보존과학 분야 전문가로 손꼽힌다.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시절에는 화협옹주 묘에서 출토된 화장품 유물을 고증하고 재현하는 연구를 해서 이를 ‘K뷰티 상품’으로 재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올해 3월 국립고궁박물관(이하 고궁박물관) 출범 이후 처음으로 개방형 공모를 통해 관장에 임명됐다. 이후 분주한 나날을 보내온 정 관장을 19일 서울 고궁박물관 관장실에서 만났다. 이날은 마침 상설전시실이 10년 만에 개편돼 외부에 공개됐고, 조선왕실의 궁중음식 문화를 조명하는 ‘궁중음식, 공경과 나눔의 밥상’ 특별전도 개막했다.

-내년이 개관 20주년이다. 고궁박물관 역사에 대해 설명해 달라.

“고궁박물관 탄생은 우리나라의 아픈 근대사와 관련 있다. 1908년 설립된 제실박물관이 일제강점기에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되었는데,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은 광복 후 국립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전신)으로 통합됐다. 하지만 일부 유물은 궁궐, 종묘, 왕릉에 흩어져 있었고, 이러한 유물과 왕실 가족들이 사용했던 생활 유물은 1992년 덕수궁에 설립된 궁중유물전시관에서 관리했다. 그 전시관이 현재의 건물로 이전 확장해 2005년에 승격한 것이 국립고궁박물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왕실 유물과 비교해 어떤 특장점이 있나.

“조선왕조의 의례에 사용된 인장과 문서인 어보·어책·교명은 우리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어보·어책은 국왕·왕세자·왕세제·왕세손과 그 배우자를 해당 지위에 임명하는 책봉 때나 국왕·왕비·상왕·왕대비·대왕대비 등에게 존호·시호 등을 올릴 때 제작한 인장과 역사적 배경을 기록한 책이다. 교명은 이들을 책봉할 때 내는 훈유 문서다. 보물로 지정된 ‘조선왕조 어보·어책·교명’ 637점 중 628점이 우리 박물관 소장이다. 이것과 함께 의복과 가구, 식기 등 왕실에서 실제 썼던 생활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는 점은 정말 자랑할 만하다. 고궁박물관은 중앙박물관에 없는 왕실 생활 유산의 보고다. ‘궁중음식, 공경과 나눔의 밥상’ 특별전도 이런 유물이 있기에 가능했다.”(이번 전시에는 왕실에서 쓰던 도마와 칼, 국자까지 나와 이채를 띠었다).

-관장 취임 후 성과를 들자면.

“올해는 다른 기관과 협업해 진행한 디지털 콘텐츠 위주의 특별전이 많았다.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과 동시 개관했던 ‘칠보산도 병풍’ 디지털 전시, 프랑스 기업 히스토버리와 함께 했던 ‘노트르담 대성당 증강현실 특별전’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8월에는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반화’를 복제해 전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아모레퍼시픽과 업무 협약을 체결했고, 9월에는 도쿄국립박물관과도 상호 교류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내년이 개관 20주년이다.

“동시에 광복 80주년이다. 이를 계기로 글로벌 뮤지엄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고궁박물관은 ‘K왕실 유산의 보물창고’인데, 한류 열풍 속에서 K컬처의 뿌리가 된 우리 왕실 문화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8월 창덕궁 벽화를 주제로 한 전시, 10월 ‘왕실·황실 문화유산 리본(RE:BORN, 재탄생)’전 등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 12월에는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해 올해 9월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도쿄국립박물관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다.”

-문화유산 보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국립문화유산연구원 보존과학실 연구원으로 입사한 첫해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 당시 입었던 의복을 보존·복원하는 일을 맡게 됐다. 조선시대 유물의 보존 연구는 시기적 거리감이 있던 것과 달리 생생한 근대사 인물의 유물을 복원하는 일이라 감동이 컸고 소명감을 더 갖게 됐다.”

-생물학이 문화유산 보존에 기여하는 메커니즘이 어떻게 되나.

“지류, 섬유, 목재 등 유기질 문화유산은 생물로부터 만들어진다. 이러한 유물은 미생물과 곤충 등에 의해 손상되고 사라지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 해인사장경판전 등 다양한 유기질 재질에 대한 재료학적 분석과 최근 흰개미에 의한 손상에 따른 목조건축물 보존 연구도 진행했다. 제 박사학위 논문이 ‘팔각회향과 정향에 분리한 살생물제의 동정’인데 이 논문은 복장유물 안에 쓰인 오향 성분의 약재가 살충·살균 효과가 있을까라는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실험 결과 효능이 검증됐고, 이는 나중에 국유특허 형태로 천연방충제로 개발돼 제품화됐다.”

-기후 위기 시대를 맞아 보존과학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 저는 문화유산 분야 국제기구이자 유네스코 공식 자문기구인 국제문화유산보존복구연구센터(ICCROM·이크롬)에서 2015년부터 8년간 한국 이사로 활동했다. 이크롬을 비롯한 국제적 논의에서도 2000년대 이전에는 수리·복원 등 손상된 문화유산의 보존과 복원에 역량을 집중했다면 이제는 선제적 예방 등 기후 위기 시대에 맞는 정책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박물관 내부 환경을 ‘온도 25도, 습도 55%’로 365일 유지 관리하는 게 아니라 겨울에는 온습도 기준을 내리고, 여름엔 올리는 등 탄력적인 적용을 하자는 그린뮤지엄 선언이 2014년 국제보존과학위원회(ICOM-CC) 총회에서 나왔다. 그린뮤지엄은 문화유산 관리 및 보존에 소비되는 에너지와 탄소 배출량 저감을 위해 친환경 관리법을 적용하는 박물관을 말하는데, 고궁박물관이 그린뮤지엄 선두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 그런 노력의 하나로 지난 7월 ‘지속 가능한 문화유산 보존’을 주제로 한 국제 학술대회를 국립해양유산연구소와 공동으로 개최한 바 있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