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살 이후 내 일상엔 ‘개운하다’ ‘상쾌하다’ 같은 단어가 없다. 늘 한 군데 이상 아프고 몸은 항상 천근만근이다.”
37년간 류마티스 관절염을 비롯한 여러 자가면역질환을 앓아온 고(故) 김경아(1970~2025) 작가가 28세 때 남긴 기록이다. 자가면역질환은 면역 세포가 외부의 병원균이 아닌 몸의 정상 세포를 공격하는 병이다. 이 책의 공저자인 그는 1988년 대학 신입생 때 류마티스 관절염을 진단받은 이후 평생을 “매일 체력장을 한 느낌”으로 살았다. 온몸에 피로감과 통증이 찾아오는 일이 다반사라 약 없이는 일상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뚜렷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병을 오래 앓는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 건 ‘내게 왜 이런 병이 생겼는가’란 근원적 질문이었다. 김 작가는 자신처럼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그 이유를 찾는 이들을 위해 “장례식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우는 곡비(哭婢)의 심정”으로 책을 썼다.
‘아픔의 회고록’이자 유고집을 완성한 건 공저자인 남편 김종호 전 한국기독학생회(IVF) 대표다. 김 전 대표는 아내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쓴 간병일지와 기도편지 등을 보탰다. 김 전 대표는 “고통받는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 위안과 공감을 경험한다”며 “누군가에게 책이 고통 중의 벗이 된다면 참 감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IVF에서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린 김 작가는 크고 작은 지병 가운데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며 고통의 의미를 헤아린다. 수시로 찾아오는 고통 탓에 매사 냉소적이던 그가 죽음을 진지하게 고찰한 건 남편이 지도한 한 대학생의 죽음 때문이다. “죽음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남은 날엔 후회 대신 사랑을 남겨야 한다.” 이때 얻은 깨달음으로 그는 그간 고민하던 입양도 결심한다.
“유한한 인생에서 고통을 의미 있게 하는 건 무엇인가”란 질문에 천착하던 그는 성경과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만 아프고 힘든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 내게 기대하신 열매는 상처 입고 결핍 있는 사람을 끌어안으라는 것 아니었을까.” 이후 각종 대회서 수상하며 수필가로 등단한 그는 고통과 사랑에 관한 글을 썼다. 입양 교육 및 성교육 강사로도 활동했다.
매 순간 고통과 동행한 그에게 죽음은 미리 준비해야 할 인생의 숙제였다. ‘존엄한 죽음’을 위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물론이고 장기 기증 서약도 미리 준비했다. 2023년 연말에 자가면역성 간염으로 입원한 이후로는 ‘엔딩 노트’도 썼다.
죽음과 삶, 희망과 고통을 논하는 그의 기록은 2024년 12월을 끝으로 멈춘다. 극심한 통증으로 5주간 입원 후 퇴원했지만, 곧 소장 천공으로 패혈증을 앓으면서다. 증상이 일부 호전되면서 일반 병동으로 옮겼으나 이후 증상은 악화됐다.
병상에서 “하늘의 아버지, 제발 이 고통에서 놓이게 하소서”라고 절규하는 아내를 보며 김 전 대표는 고뇌에 빠진다. 조금 더 아내가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극한의 고통에서 아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 가운데서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다.
결국 그와 가족은 일반 병실에서 정신이 들 때마다 “연명 치료는 안 된다”고 당부했던 아내의 뜻을 존중한다. 의료진의 자문을 거쳐 연명 치료를 멈춘 뒤로도 김 전 대표의 번민은 끊이지 않았다. 아내의 뜻대로 고통을 덜어준 데다, 부활을 확신해 내린 신앙적 결단이었지만, 쉽게 포기한 건 아닌가 싶은 슬픔이 몰려왔다. 김 작가는 연명 치료 중단 9일째에 잠자듯 세상을 떠났다.
김 전 대표는 생전 아내처럼 기도에 응답지 않는 하나님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한 달 가까이 애도 기록을 남기며 내린 결론은 “문제를 거둬 가진 않지만 그 과정에 함께하는 분과 계속 동행하며” 이웃 환대와 위로에 힘쓰는 것이다. 아내처럼 “자유롭고 용감하며 현명한 태도”로.
김 전 대표가 전한 마지막 당부이자 바람이다. “부디 아내의 고난과 선택이 죽음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시간표에 따라 자기의 때에 자기답게 떠나는 선택을 하는 데 참고자료가 되길 바란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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