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재일조선인과 달리 당신은 교양 있어 보이니 기모노를 입고 일본인처럼 살아도 좋다.”
일본인 학부모의 이 말에 이와이 도미코는 70만엔짜리 기모노를 할부로 샀다. 재일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숱한 차별을 겪었던 그녀였기에 자녀들마저 무시당하며 살게 하기 싫었다.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던 서른한 살 때 모습이다.
“성경에는 ‘너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이제 더는 식민지 시대가 아니고 우린 자유롭습니다. 부모와 자녀 모두 민족명인 본명을 사용해주십시오.”
‘재일동포의 마틴 루서 킹’으로 불린 이인하(1925~2008) 가와사키교회 목사가 전한 말씀을 듣고 도미코는 마치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고 전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전까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더라고요. 그 길로 기모노를 팔아 역사책을 샀어요. 제 뿌리를 알려면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때 도미코라는 이름을 버리고 ‘송부자’라는 한국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23일 영상통화 화면 너머로 이렇게 고백하는 송부자(84·사진) 일본 가와사키교회 장로의 눈빛은 반짝였다.
송 장로는 재일대한기독교회 교단 소속 장로로서 신앙을 중심에 두고 50년 넘게 재일동포 인권운동과 혐한시위 대응의 최전선에 서 왔다. 송 장로의 부모는 1928년 일본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송 장로가 두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 홀로 고물을 주워가며 6남매를 키웠다. 가난한 이방인의 삶엔 절망이 가득했다. 학교에선 “냄새나는 조선인”이라며 따돌림을 당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도피하듯 결혼했지만 남편은 폭력을 일삼았다. 31세에 인권운동가 이 목사의 설교를 들은 게 전환점이었다.
“덧셈 뺄셈도 못 하던 저였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싶었어요. 난 차별당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구나. 주님은 나를 사랑하셔 직접 날 선택하셨구나 하는 걸 깨닫고는 종일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로 역사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재일동포 차별철폐에 헌신한 이 목사를 도왔다. 1970년대엔 히타치 취업차별 사건에서 최종 승소판결을 얻어냈고, 80년대엔 지문날인 철폐 운동, 이후 시영주택 입주, 아동수당, 금융권 대출 문제 등에서 재일동포가 받는 차별 해소를 위해 노력했다.
연극으로도 차별철폐운동을 이어갔다. 재일조선인을 멸시와 조롱의 시선으로 표현한 어느 연극을 본 것이 계기였다. 송 장로는 ‘신세타령 재일 3대사’라는 제목의 1인극으로 일본 전역을 돌며 460회 넘게 공연했다. 그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혐오에 맞서, 조선인의 인간다움과 품위를 전하려는 몸부림이었다”고 말했다.
그 무렵 일본 사회에 한국에 관한 바른 역사를 알릴 고려박물관 건립이 추진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20년간 공연하며 모은 115만엔을 모두 기부했다. 2001년 도쿄의 고려박물관 초대관장을 지낸 송 장로는 재임 기간 일본인과 재일한국인이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며 우호를 돈독히 하는 데 힘썼다.
송 장로의 또 다른 꿈은 가와사키 시내에 재일조선인 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재일동포들이 감내해 온 차별의 역사와 왜곡된 진실을 후대에 알리고 교육하는 것이 목표다. 송 장로는 이날 일본을 방문해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이재명 대통령의 재일동포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어 역사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을 담은 편지를 써서 정부 측에 전달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차별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하고, 다문화 공생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투쟁의 발자취를 전하는 장소를 만드는 것입니다. 방문자들이 차이를 넘어 공생의 미래를 그리며, 서로를 배우고 깊은 연대감을 느끼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 현재 ‘재일동포는 평화의 사자다’란 제목의 책도 쓰고 있습니다. 신앙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게 된 제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고 평등과 평화를 창조하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제 생애가 다하기 전에 꼭 이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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