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문 관객’ 시초 뮤지컬 ‘베르테르’… 25주년 기념 공연

뮤지컬 ‘베르테르’가 25주년 기념 공연으로 돌아왔다. 지난 17일 개막한 ‘베르테르’(~3월 16일 디큐브 링크아트센터)는 한국 뮤지컬의 역사에서 독특한 길을 걸어온 작품이다.

괴테의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원작인 ‘베르테르’는 섬세한 성격의 청년 베르테르가 짝사랑하던 롯데와 약혼자 알베르트의 결혼 이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배우 출신 프로듀서 심상태가 이끌던 극단 갖가지가 2000년 11월 두산아트센터에서 고선웅 극본, 정민선 작곡 뮤지컬로 첫선을 보였다. 이후 꾸준히 공연된 ‘베르테르’는 현재 공연되는 대극장 창작뮤지컬 가운데 ‘명성황후’ 다음으로 긴 역사를 자랑한다. 여기에는 극단 갖가지가 2010년부터 ‘베르테르’ 공연권을 CJ ENM과 공유하는 독특한 형태인 것도 관련 있다.


작품을 탄생시킨 오리지널 프로듀서이자 2010년부터 예술감독을 맡아온 심상태 극단 갖가지 대표가 지난해 12월 별세하자, CJ ENM은 이번 25주년을 기념해 준비 중이던 ‘베르테르’의 브랜드북 ‘러브레터’에 추모의 마음을 담았다. 유통업계에서 유행하는 브랜드북은 브랜드의 역사와 이야기를 집대성한 책이다. 24일 출간되는 한국 공연계 최초의 브랜드북 ‘러브레터’에는 ‘베르테르’의 역사와 창작진 인터뷰 등이 담겼다.

특히 초연 당시 창작진으로 고선웅과 정민선이 참여하게 된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고선웅이 지금은 국내 공연계에서 손꼽히는 극작가 겸 연출가지만 당시엔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막 당선된 신인이었다. 그리고 정민선도 한국 뮤지컬 음악에 신기원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당시엔 클래식 음악 전공자로서 뮤지컬 작곡 경험이 전무했다. 하지만 심 대표가 창작진으로 두 사람을 영입한 것은 ‘신의 한 수’가 됐다. 심 대표는 ‘베르테르’를 시작으로 ‘카르멘’(2002년 초연), ‘히드클리프’(2022년 초연)까지 남자의 사랑을 소재로 한 창작뮤지컬 3부작을 두 사람과 함께하게 된다.

고선웅은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부담이 컸다. 뮤지컬 대본이 처음이기도 했지만, 원작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다. 베르테르의 뜨거운 감정을 덜어내 전반적으로 서정적이고 담담한 느낌을 담으려고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정민선은 “미국 유학 중 한국에 잠시 들어왔을 때 동네 카페에서 내 실내악곡을 담은 CD를 틀었는데, 손님 중 누군가가 듣고 ‘베르테르’ 프로덕션에 추천했다”면서 “당시 팝적인 요소가 많은 기존 뮤지컬 작법을 잘 몰랐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뮤지컬이라기보다 오페레타로 작곡했다고 봐도 될 듯하다”고 설명했다.



김광보가 연출한 2000년 ‘베르테르’ 초연에는 서영주, 이혜경, 김법래 등이 출연했다. 당시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 현악기로 구성된 5인조 실내악단의 섬세하고 우아한 음악이 호평을 받았다. 특히 독일 가곡을 연상시키는 대표곡 ‘하룻밤이 천년’과 ‘내 발길이 붙어 뗄 수가 없으면’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베르테르’는 이듬해 한국뮤지컬대상 7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음악상을 받는 데 그쳤다. 하지만 팬들의 모임인 ‘베사모’(베르테르를 사랑하는 모임)가 결성될 정도로 마니아 관객을 낳았다. 이른바 ‘회전문(반복관람) 관객’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뮤지컬 시장의 중요한 성장 동력인 팬덤 문화가 시작된 것이다.


고선웅이 직접 연출을 맡은 2001년 공연은 제목을 원작대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변경하고 대본과 음악을 한층 업그레이드했다. 이어 배우 조승우와 엄기준이 베르테르 역으로 더블캐스팅 됐던 2002년 공연은 매진을 기록했다. 당시 베사모 회원들이 열정적으로 공연 홍보에 나선 덕분이다. 그런가 하면 조광화가 연출한 2003년 공연은 당시 재정난을 겪던 극단 갖가지를 위해 베사모 회원 20여 명이 3억원을 모아준 덕분에 성사됐다. 회원들은 제작비 조달부터 시작해 기획, 홍보, 마케팅 등을 도맡았다.

극단 갖가지는 2006년 재공연에 이어 2007년 초연 멤버들로 다시 공연을 올렸지만, 다시 재정난으로 활동이 위축됐다. 2009년 CJ ENM이 제안한 공동제작을 심 대표가 받아들이면서 ‘베르테르’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공연을 올릴 때마다 시끄러웠던 개런티 지연 지급 또는 미지급 사태도 이때부터 해결됐다.

고선웅도 브랜드북 ‘러브레터’에서 개런티 문제를 언급하며 “제작자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이재에 밝고 능력도 있어서 흥행에 성공하는 사람, 이재에 밝지도 않고 흥행도 잘 못 하지만 꿋꿋이 그 길에 있는 사람”이라면서 심 대표는 후자였다고 썼다. 그러면서도 예술감독으로서 심 대표의 열정을 기렸다.


김민정이 연출한 2010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공연은 원작 속 자석산의 전설을 작품의 주요 모티프로 끌어들여 무대 세트를 거대한 배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이 버전으로 2012년 공연과 이듬해 일본 초청 공연이 이뤄졌다. 하지만 조광화가 다시 연출을 맡은 2013년 공연이야말로 현재까지 관객과 만나는 버전의 출발점이다. 이때 작품 제목이 다시 ‘베르테르’로 바뀌는 한편 해바라기꽃의 상징적인 활용, 밝고 화사한 현대적인 의상으로의 교체 등이 이뤄졌다. 또한, 음악도 11~14인조 실내 체임버 오케스트라로 훨씬 풍성해졌다. 이후 15주년이던 2015년, 20주년이던 2020년, 25주년인 올해까지 5년마다 공연이 올라가고 있다.

그동안 ‘베르테르’는 젊은 뮤지컬 배우가 한 번은 거쳐 가야 할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두 남녀 주인공으로 많은 배우가 출연했지만, 베르테르 역의 엄기준과 롯데 역의 전미도가 캐릭터에 가장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25주년 기념 공연에 두 배우는 후배들과 함께 다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는 “‘베르테르’는 원작을 통해 결말이 이미 알려진 데다 공연 템포도 느려서 한국 뮤지컬 특유의 ‘말초적 감각’에 전혀 어필할 수 없는 작품”이라면서 “하지만 ‘베르테르’의 생명력은 관객이 베르테르의 감정을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클래시컬한 음악의 힘과 함께 작품을 거쳐간 배우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공연 초기 베르테르를 연기한 서영주와 엄기준을 일등공신으로 꼽고 싶다”고 지적했다. 이어 “‘베르테르’ 25주년 공연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 2002년 공연 이후 더 진행될 수 없었던 작품이 베사모의 도움으로 이어간 데 이어 다시 CJ ENM이 들어와 성공하게 됐다”면서 “베르테르’의 역사는 한국 뮤지컬 발전의 중요 요소 중 하나인 관객과의 스킨십을 상기시킨다는 측면에서 매우 흥미롭다”고 덧붙였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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