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거리 나온 K팝 응원봉 정치·대중문화 벽을 허물다

티셔츠와 엽서엔 정치인의 얼굴이, K팝 아이돌의 응원봉에는 정치적 요구가 담겼다. 정치와 대중문화가 서로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소비문화가 형성됐다. 유권자는 굿즈를 소비하는 팬덤이기도 하고, 정치 집회는 아이돌 콘서트장의 열기를 방불케 한다. ‘정치의 K팝화’와 ‘K팝의 정치화’는 대중문화의 소비가 민주주의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트럼프 머그잔, 트럼프 달력,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저택 모형….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자신의 이름을 딴 각종 굿즈(기념품) 판매에 열을 올렸다. 대선 승리 이후에도 굿즈 출시는 이어졌다. 성탄절 상품을 내놓으며 트럼프는 제45대와 제47대 대통령임을 강조하는 ‘45-47’ 숫자를 새기기도 했다. 트럼프가 자신의 사업체인 트럼프 그룹에 굿즈 수익을 귀속시키며 돈벌이를 이어간다는 비판도 거셌다.

일본에서도 비슷하다. 최근 산케이신문사가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달력을 발매했다. 고인이 된 정치인 달력 발매에 대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일본 과자회사 다이토는 지난해 퇴임한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의 캐리커처가 새겨진 전병과 쿠키, 샐러드드레싱 등을 판매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정치 굿즈는 유권자와 지지자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유대를 형성하는 수단으로도 자리 잡았다. 과거에는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한 굿즈의 제작을 주로 팬클럽이 주도해왔다. 2023년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의 지지자들이 제작한 ‘후니’ 인형, 2019년 문재인 전 대통령의 팬카페에서 제작한 ‘달봉이’라는 이름의 응원봉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당이나 정부가 직접 정치 굿즈를 출시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조국혁신당은 당 로고가 새겨진 양말과 조국 전 대표의 사진 엽서 등으로 구성된 ‘신년맞이 굿즈’ 세트 2종을 선보여 하루 만에 완판됐다.


정치 굿즈의 인기는 중고 거래 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의 손목시계는 한때 높은 거래가를 형성했으나,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가격이 급락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정치 굿즈가 사회적·정치적 영향을 받는 소비재임을 보여준다.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인 팝업스토어를 활용하는 시도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8월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전국당원대회에서 당원 중심의 체험 행사와 굿즈 팝업스토어를 운영했다. 이 행사에서는 DJ 티셔츠, 포토카드, 에코백 등이 판매됐는데, 이를 구매하기 위한 당원들의 오픈런 행렬이 이어졌다.


K팝 팬덤은 최근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강력한 주체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서 형형색색의 응원봉이 사용되며 화제가 됐다. 글로벌 유통 시장에서 이미 강력한 소비층으로 자리 잡은 아이돌 팬덤이 광장을 채우는 장면은 국내 언론과 외신의 주목을 받았다. 일부 정치인은 이런 흐름에 편승해 응원봉을 들고 있는 사진이나 집회에 참여한 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게시하기도 했다.

콘서트장에서 쓰이던 ‘응원봉’과 ‘LED 촛불’은 이커머스 검색어 상위에 올랐다. 쿠팡 등에서는 일부 LED 응원봉이 품절되기도 했다. 중고나라, 번개장터 등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도 응원봉 판매 게시글이 쏟아지며 구매 열기가 확인됐다. 탄핵안 가결 이후 언론사에서 배포한 호외신문도 새로운 ‘탄핵 굿즈’로 주목받으며 중고 시장을 달궜다.

집회 현장에서 나타난 ‘선결제 문화’ 역시 아이돌 팬덤의 나눔 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아이돌 콘서트나 팬미팅 현장은 오래전부터 팬들 간 나눔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굿즈나 음식을 나누어주는 팬덤 문화가 집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K팝 음악은 집회 참가자들을 하나로 묶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5060세대는 집회에서 흘러나오는 K팝, 소위 ‘탄핵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며 젊은 세대의 음악을 익히는 모습도 보였다. 탄핵 플레이리스트는 기존의 민중가요 역할을 대신하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2016년 이화여대 학내 시위와 2020년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 사용되며 시위의 상징적 음악으로 자리 잡은 바 있다.

한편 아이돌 팬덤이 그동안 편견에 가려져 있었을 뿐, 항상 정치적 주체였다는 평가도 있다. 2000년대 초반 열애설로 퇴출 위기에 놓인 멤버를 보호하기 위해 광고주에 공문을 보내고 트럭 시위를 이어간 지오디 팬덤이 대표적 사례다. 음악 저작권 개선을 위해 국회 토론회를 개최했던 서태지 팬덤,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과 2018년 버닝썬 게이트 사건 이후 성범죄 연루 멤버의 탈퇴를 촉구했던 팬덤 활동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위 사례들은 정치의 대중화를 명확히 보여준다. 굿즈는 단순한 상품의 영역을 넘어 메시지를 전달하고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표현하는 강력한 도구로 자리 잡았다. 특히 젊은 세대의 정치적 참여에 대한 긍정적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조앤 조 웨슬리언대학 동아시아학 교수는 윤 대통령 탄핵 집회를 두고 “주목할 만하고 고무적”이라며 “젊은 층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참여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편견을 깨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중문화 콘텐츠가 정치적 담론의 주요 매개체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나 영화 ‘서울의 봄’은 한국 사회의 정치적·역사적 문제를 조명하며 중요한 대화의 장을 열어왔다. 테일러 스위프트와 같은 세계적인 스타들은 플랫폼을 활용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며 대중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흐름 속에 정치가 단순히 소비와 상업화에 머무르지 않고 팬덤과 유권자가 진정한 정치적 주체로 기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정당은 이제 전통적인 특정 목적 단체의 역할을 넘어 대화와 타협을 통해 공존을 이루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정치는 기존의 권위적 틀에서 벗어나 대중의 관심을 기반으로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다연 기자 id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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