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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이야기는 계속된다

김철오 온라인뉴스부 기자


월드컵 개막 이틀째인 지난달 21일 카타르 도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이란을 상대로 6번째 골을 넣고 요란한 춤을 춘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미드필더 잭 그릴리시의 세리머니는 준비된 동작이었다. 그릴리시는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11세 뇌성마비 소년을 월드컵 전에 단둘이 만났다. 그릴리시가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는데, 소년은 자신을 위한 월드컵 골 세리머니를 청했다. 소년은 힙합 안무를 원했지만 춤에 자신이 없던 그릴리시는 더 쉬운 동작을 부탁했다. 소년은 두 팔을 양옆으로 벌리고 요란하게 흔드는 동작을 직접 보여준 뒤 “월드컵에서 골을 넣고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정규시간 종료까지 15분을 남기고 교체 투입된 그릴리시에게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릴리시는 정규시간 종료를 불과 1분 남긴 후반 44분 기어이 오른발 슛으로 골문을 열었다. 그릴리시는 대표팀 동료들과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눈 뒤 소년의 소원대로 요란한 동작의 춤을 췄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워 상대를 도발한 것으로 오해를 받았다. 참패를 앞둔 이란 선수들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경기를 마친 뒤 그릴리시의 SNS에 올라온 짧은 글이 논란을 일소했다. 그릴리시는 자신의 세리머니 영상을 올려놓고는 이렇게 적었다. “핀레이, 너를 위한 거야.” 뇌성마비 소년의 이름은 핀레이였다.

핀레이는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됐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핀레이를 찾아가 그릴리시와의 인연을 묻고 소원을 성취한 소감을 물었다. “최고였어요. 사랑해요. 그릴리시!” 축구팬에게 이만한 행복이 또 있을까.

핀레이가 월드컵을 앞두고 그릴리시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이랬다. ‘축구 스타인 당신은 뇌성마비 환자와 함께 살고 있지요? 그 삶이 어떤지 알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요.’ 27세인 그릴리시에게는 핀레이처럼 뇌성마비를 앓는 19세 여동생 홀리가 있다.

어디서나 그렇듯 스포츠에서 이야기의 힘은 강하다. 월드컵은 국제축구연맹(FIFA) 회원 211개국의 이야기를 32개 본선 진출국으로 압축해 풀어내는 4년짜리 서사의 클라이맥스다. 예선에서 탈락한 국가 축구팬들도 월드컵 이야기를 함께 즐기며 열광하고 눈물을 쏟는다.

그릴리시가 요란한 춤을 춘 경기에서 세계인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이란 대표팀 선수들의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이들은 경기 시작을 앞두고 월드컵 식순에 따라 자국 국가가 연주될 때 하나같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지난 9월 13일 이란 수도 테헤란 도심 한복판에서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도순찰대에 체포된 22세 여성 마흐사 아마니는 사흘 만에 주검으로 돌아왔다. 들불처럼 번진 이란 국민의 반정부 시위는 페르시아만 너머 카타르에서 월드컵 축제가 시작된 뒤에도 잦아들지 않았다.

이란 선수들의 침묵은 국민에게 폭력을 가하고 국정 혼란의 책임을 묻는 정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저항이었다. 그 침묵이 정치적 적성국인 미국 잉글랜드 웨일스와 16강 진출을 경쟁하는 정도로 서술됐던 이란 선수들의 이야기 구도를 완전하게 바꿔놨다. 이란과 미국의 지난달 30일 조별리그 최종전을 한때 ‘핵 협상 더비’로 묘사했던 서방 언론들도 더는 적대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경기에서 승리한 미국 선수들은 좌절한 이란 선수들을 다독이고 위로했다.

지난 3일 포르투갈에 역전승을 거두고 극적으로 16강 진출을 이뤄낸 한국 대표팀의 도전은 불과 사흘 뒤 브라질에 1대 4로 완패하면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한국 축구팬들의 반응을 더 강하게 끌어낸 건 황희찬의 결승골을 연결할 때까지 70m를 달려 포르투갈 수비수 3명을 뚫고 정확한 패스를 찔러준 주장 손흥민의 ‘마스크 투혼’ 이야기,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를 새긴 한 관객의 태극기가 선수들의 손에 쥐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은 집념의 이야기였다.

월드컵은 이제 3·4위전과 결승전의 두 경기를 치르면 막을 내리지만, 이야기는 계속된다. 내년 어느 시점이 되면 태평양 섬나라와 히말라야 고산지대에서 새로운 4년의 이야기를 시작할 월드컵의 서막이 조용하게 열릴 것이다. 새로운 4년의 서사에서 다시는 쓰지 말아야 할 이야기도 있다. 감염병 대유행과 전쟁 같은 것들.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김철오 온라인뉴스부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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