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아름답지만 정치적인 러시아 최고의 소프트파워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 기조연설에서 러시아 발레를 관람하고 싶다고 언급했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한국도 러시아 경제 제재에 동참했지만, 집권 초기부터 러시아와 관계를 중시한 문 대통령이 당시 러시아 발레를 이야기한 것은 자연스럽다. 문 대통령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 정상이나 외교사절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발레를 보거나 언급하는 것은 오래된 외교적 제스처다. 러시아 발레가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위상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문화 사절로서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세계 각국에서 러시아의 양대 발레단인 마린스키 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을 필두로 많은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이 취소됐다. 양대 발레단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무용수의 퇴단에 이어 볼쇼이 발레단의 스타 무용수 올가 스미르노바가 반전 메시지와 함께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으로 이적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세계적 위상 하락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러시아 발레가 오랫동안 내포하고 있던 정치성이 주목받고 있다.


발레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궁정연회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17세기 프랑스에서 발레학교가 만들어지며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등 서유럽에서 발레가 여흥 거리로 전락한 이후 러시아가 발레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클래식 발레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극장(현 마린스키 극장)에서 많은 작품을 안무 또는 재안무했다.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 ‘라바야데르’ ‘호두까기 인형’ 등 오늘날 전 세계 발레단의 인기 레퍼토리들은 황실극장에서 프티파가 만든 것이다.

발레가 오늘날의 위상을 갖게 된 것도 러시아 덕분이다. 1909~29년 ‘발레 뤼스’(프랑스어로 러시아 발레단이란 뜻)의 전 세계 투어는 발레의 부흥을 이끌었다. 특히 발레 뤼스 출신 무용수나 안무가가 1917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소련)로 돌아가지 않고 유럽이나 미국에 남아 발레단을 만들거나 발레 교실을 운영한 게 큰 역할을 했다.

발레는 러시아 황실의 지원을 받았지만, 소련 건국 이후에도 인민의 애정 덕분에 살아남았다. 물론 스탈린 집권 이후에는 다른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가치를 담아야 했다. 클래식 발레의 대표작 ‘백조의 호수’ 결말이 왕자와 공주가 모두 죽는 슬픈 결말에서 왕자가 악마를 물리치고 공주를 구하는 해피엔딩으로 바뀐 재안무가 나온 것도 이 시기다. 국가에 순응적이었던 발레는 당국의 지원 아래 성장을 거듭했다.

흐루쇼프의 해빙 정책에 따라 이뤄진 56년 볼쇼이 발레단의 런던 공연은 소련 발레의 놀라운 수준을 서방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소련에 대한 적대감을 줄이는 데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발레의 가치를 파악한 소련 당국은 볼쇼이 발레단과 키로프(현 마린스키) 발레단의 해외 순회공연을 여는 한편 발레 교사들을 각국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61년 키로프 발레단의 프랑스 공연 직후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가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소련 무용수들의 망명을 촉발했다. 70년 나탈리아 마카로바, 74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79년 알렉산더 고두노프, 레오니드 코즐로프와 발렌티나 코즐로프 부부, 80년 술라미스 메세레르와 미하일 메세레르 모자 등이 서방으로 망명했다. 이들이 가져온 러시아 발레의 위대한 유산은 서방의 발레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그동안 서방에 작품 일부만 알려졌던 ‘돈키호테’나 ‘라바야데르’가 전막으로 공연된 것도 이들이 망명하면서부터다.


냉전 시대 소련 무용수들의 망명은 이념 전쟁에서 소련에 대한 서방의 승리로 간주됐다. 하지만 이 때문에 소련과 서방 사이엔 첨예한 갈등이 불거지곤 했다.


80년대 말부터 소련 무용수들의 서방 러시가 다시 한번 이어졌다. 이번엔 망명이 아니라 돈 때문이었다. 심각한 경제 위기에 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등 정치적 불안까지 겹치면서 정부 지원에 의존하던 공공 극장은 월급을 제대로 주기도 어려웠다. 볼쇼이와 키로프 발레단은 적극적인 해외 투어를 통해 재정 위기를 헤쳐나갔다. 88년 볼쇼이 발레단 수석 무용수 안드리스 리에파와 니나 아나니아쉬빌리가 당국의 허가를 받고 아메리칸발레씨어터(ABT)에서 활동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많은 무용수가 서방으로 떠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경제 위기는 러시아 발레에 대한 세계 각국의 열망을 러시아 발레계가 깨닫게 했다. 해외 투어 전문 민간 발레단이 잇따라 출범했다. 볼쇼이와 마린스키 발레단은 개런티가 높아 다소 저렴한 가격에 공연이 가능한 민간 발레단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러시아 무용수들이 자유롭게 해외에 진출하는 등 전 세계 발레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서방이 러시아 발레에 느끼던 경이로움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동안 서방의 발레 수준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 감성의 창작에서는 서방이 러시아를 앞지르게 됐기 때문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는 러시아 발레를 다시 정치적 논쟁의 중심으로 밀어 넣었다. 마린스키와 볼쇼이 발레단을 비롯해 투어에 의존하는 러시아 민간 발레단의 공연이 잇따라 취소됐다. 국제 발레계는 우크라이나 발레단과 무용수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등 연대 의지를 피력했다.

러시아 국적 무용수들의 행보는 엇갈리고 있다. 영국 로열발레단에서 활동하는 나탈리아 오시포바가 우크라이나 지원 갈라 공연에 나서는 등 해외 거주 러시아 무용수들은 반전 메시지를 내고 있다. 반면 러시아 거주 무용수들은 대부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올가 스미르노바나 마린스키 발레단의 디아나 비쉬네바와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처럼 반전 메시지를 발표한 이는 극소수다. 평소 푸틴 지지자로 유명했던 스타 무용수 세르게이 폴루닌과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역시 입장을 표명하라는 발레 팬들의 요구에도 입을 닫고 있다.

발레는 러시아 최고의 소프트파워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 전쟁이 끝나더라도 러시아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러시아 발레단이나 무용수는 환영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러시아 발레가 외교사절이나 문화상품으로서 다시 해외에 나가도 예전 같은 환영과 찬사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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