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 통째 외워 찬양… 열정, 울림이 되다

시각장애인 10명 - 비장애인 9명… 서울필로스앙상블 특별한 하모니

서울필로스앙상블 김숙희 지휘자(왼쪽 첫 번째)를 비롯한 단원들이 지난달 9일 서울 강남구 대웅제약 베어홀에서 열린 제1회 정기연주회 무대에 올라 노래하고 있다. 서울필로스앙상블 제공

앞 못 보는 단원이 보이는 단원의 팔에 손을 얹고 함께 무대에 오른다. 눈이 반쯤 감겼거나 다른 곳을 보거나 짙은 색 선글라스를 쓰기도 한다. 단원들 서로가 정면을 보도록 잠시 속삭인 뒤 함께 노래를 시작한다.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서울필로스앙상블이다.

지난 11일 서울 송파구 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 5층에 앙상블 단원들이 모였다.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부터 시작되는 연습 시간이다. 첫 곡은 찬송가 588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였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농사하지 않으며/ 곡식 모아 곳간 안에/ 들인 것이 없어도/ 세상 주관하는 주님/ 새를 먹여 주시니/ 너희 먹을 것을 위해/ 근심할 것 무어냐’ 웅장한 4부 합창이 빠르고도 신나게 이어졌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와 더불어 단원들이 좋아하는 노래 역시 찬양인 ‘내 눈을 여소서’이다. 눈을 뜨고 보는 것에 대한 염원이 남다르다. 시각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어울려 연습하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2015년 완전 실명을 하기 전까지 애널리스트로 일했던 박철현(53)씨가 말문을 열었다.

“연습에 앞서 준비가 좀 필요합니다. 일반인은 악보를 보며 연습하면 되는데, 우리는 집에서 노래를 외워와야 합니다. 악보를 못 보니까요. 그래서 지휘자님이 고생을 좀 하십니다. 지휘자님이 4개 파트를 각기 불러 미리 녹음하신 뒤 카카오톡으로 월요일에 녹음 파일을 보내 주세요. 그걸 우리는 수요일까지 계속 듣습니다. 제대로 익히려면 이틀간 100번쯤 들어야 해요. 가사와 리듬을 집에서 외워온 뒤 여기서 흐름과 호흡을 익히며 함께 부르는 겁니다.”

박씨는 “눈이 멀고 난 뒤 마땅히 할 게 없어 작곡을 배웠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가운데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 많다. 보는 대신 듣는 감각이 발달하는 것이다. 박씨는 그러나 어셔증후군 환자다. 시각장애와 함께 청각장애가 진행되는 질환으로 현재 한쪽 귀도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CCM ‘기도’와 ‘다시’를 작곡해 유튜브에 공개하는 등 작곡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박씨는 “단원들과 함께 즐겁게 노래하고 찬양을 만들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 11일 서울 송파구 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 5층에서 연습하고 있는 서울필로스앙상블 단원들. 강민석 선임기자

올해 1월 창단한 서울필로스앙상블은 시각장애인 10명, 비장애인 7명의 단원으로 구성돼 있다. 서울 동암교회(김성일 목사) 성가대 지휘자인 소프라노 김숙희(39·여)씨가 이곳에서도 지휘자로 섬기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오페라를 전공한 김씨에게 단체 이름 ‘필로스’와 ‘앙상블’에 관해 물었다.

“사랑에는 남녀 사이의 에로스, 엄마의 아가에 대한 것처럼 무조건적인 아가페, 친구 사이 우정을 뜻하는 필로스,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시각장애인과 진정한 친구가 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자는 의미로 필로스입니다. 저희는 아직 후원이 없어 자발적으로 회비를 걷어 운영하고 인원도 중창단 수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대규모 합창단으로 나아갈 것이란 꿈을 갖고 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아직 합창단이 아닌 앙상블입니다.”

시각장애인이 일반인과 함께 화음을 내면 어떤 점이 좋을까. 전맹인 정영남(59·여)씨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2살 때 고열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그는 “목소리가 아기처럼 나오던 저였는데, 지휘자님 레슨을 받으며 성숙한 목소리로 바뀌었다”고 했다. 이어 “저희끼리만 있으면 뭔가 꽉 막혀있고 이동할 때도 어렵고 소리도 잘 안 나오는데, 여기선 보이는 분들이 함께 어울려주니 확 열리는 느낌을 받는다. 단원들이 가족처럼 대해주니 좋다”고 말했다.

일반 단원은 20대 대학생부터 70대 단장까지 연령을 초월한다. 알토 파트의 한월명(70·여) 단장은 “이틀 만에 연습곡을 모조리 외워오는 단원들을 볼 때마다, 비장애인인 나는 뭘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이들만큼 열정이 있는지 자문하곤 한다”고 밝혔다. 한성대에 재학 중인 테너 파트 채승진(24)씨는 복지관에 봉사를 왔다가 연습 장면을 보고 단원으로 합류했다. 채씨는 “노래 부를 때의 표정이 다들 너무나 행복해 보여 저도 저 자리에 서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베이스 파트에는 국내 정상급 헤비메탈 밴드인 ‘나티’의 리드보컬 김상수(47)씨가 있다. 김씨는 2014년 오토바이 사고로 뇌출혈이 발생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회복한 경험이 있다. 김씨가 병상에 있을 때 한국락음악협회는 전국의 밴드를 모아 서울 마포구 홍대 앞 롤링홀에서 그의 쾌유를 응원하는 릴레이 공연을 했다. 집사 직분인 김씨는 “처음엔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는데 딱히 제가 도와드릴 것 없이 다들 잘 지내신다”면서 “제가 아무리 힘들다 해도 여기 단원들만큼 힘들 수는 없다. 연습하고 나면 제가 더 마음이 따듯해진다. 제가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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