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태어난 지 8개월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고 다섯 살 때 새어머니가 들어오셨다. 4명의 이복동생들 틈바구니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서 부엌에 나가 손에 물이 마를 시간 없이 일을 하며 심한 차별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뭐하냐? 내가 시킨 일 다 했냐?” “도대체 네가 잘 하는 게 뭐 있냐?” 등의 소리를 늘 들었다. 동생들처럼 간식도 한 번 먹지 못하고 눈치 속에 바보처럼 살았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잘 하는 것은 하나도 없이 놀림만 받고 자랐다. 아버지도 아무 힘이 없이 강한 새어머니에 의해 집안은 돌아갔다. 결국 나는 학교도 중학교에서 끝마쳤다.
오직 한 가지 희망인 결혼을 했지만 그것도 꿈이었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남편은 술, 담배, 게으름으로 경제력도 없었고, 수시로 폭언과 폭행을 가했다. 개인택시 자격을 받을 수 있는 기간에 음주 운전으로 자격이 취소되는 등 삶에 대책이 없었다. 가정의 내일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내 아이만은 나처럼 기르지 않겠다며 독하게 버텼다. 어느 날 너무 힘들어 가까운 교회에 갔는데 눈물만 쏟아졌다. ‘예수님은 나를 다 아시겠지….’ 하는 마음과 성도들의 따뜻한 말과 사랑이 큰 위로가 됐다. 그러나 현실의 원망과 낙심은 떨칠 수 없었다.
아들의 대학 졸업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그것마저 물거품이 됐다. 선교사가 되겠으니 허락해달라고 했다. ‘이 놈은 도대체 우리 형편을 아는 건가? 어떻게 이렇게 철이 없어?’ 원망하고 분노하는 내게, 나중에 엄마가 가장 기뻐하실 거라며 계속 나를 설득 했다. 어느 날 ‘낳고 기르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앞길을 인도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이 떠올라 결국 내 생각을 접었다. 극도의 가난에, 남편이 뇌경색으로 두 번째 쓰러져 대·소변을 받아내는 상황이 되자 몸과 마음은 한계점으로 향했다. ‘정말 하나님은 이 고통을 알고 계실까?’ 교회 문만 나서면 근심과 두려움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다시 이를 악물었다.
설상가상으로 무릎에 물이 차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게 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아들을 따라 춘천으로 왔다. 기쁨에 넘치는 성도들의 모습은 넘어진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조금씩 마음도 녹기 시작했다. 목사님의 ‘전능자가 오셨다 가셨다.’ ‘복음이면 다 된다’는 말씀은 내 심장을 찔렀고, 요한복음 2장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는 말씀으로 내 눈이 확 열렸다. 성령께서는 그동안 내가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음도 알려주셨다.
‘예수 믿으면 가난에서 벗어나고 병도 치유되고 자식도 잘되고….’ 예수님은 내게 부적과 같은 존재였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믿어지니까 내가 지은 죄가 정확히 보였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내가 주인 되어 살았던 죄!’ 그대로 회개가 터졌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을 했다. 더 이상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남편의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했지만 모든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지금 나는 대학 병원에서 일한다. 어느 날 스님이 환자의 병문안을 와서 부처의 가르침을 전할 때 갑자기 환자가 ‘주여!’ 하며 소리쳤다. 옆에서 놀란 내가 ‘왜 주여!’ 했느냐고 하니까 ‘고모 따라 교회에 다녔는데 자신도 모르게 나왔다’고 했다. 스님과 상관없이 나는 흥분해 복음을 전했다. 놀랍게도 병상의 많은 분들이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일이 계속 일어난다.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던 친정어머니에게도, 극진히 간병을 하는 내게 늘 고맙다고 하는 시어머니와 시동생들에게도 기쁘게 복음을 전한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삶을 기쁨의 삶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의 남은 삶을 모두 주님께 드릴 것이다.
이경희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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