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도에서 전해온 전도 이야기(45) 해녀의 발이 성하지 못한 이유

Է:2025-04-2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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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호 목사·보길도 동광교회

엄마들의 직업은 몇 가지나 될까요. 식모 깡패 선생님 만물박사 등 참 많습니다. 이 모든 직업을 날마다 활용해도 월급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직 가정과 자식을 위해 여러 직업을 소유하고 살아왔던 어머니들 이야기 중에 오늘은 보길도에서 해녀로 살았던 마영단 할머니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올해 80세 되신 마 할머니는 아픈 데가 많습니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눈도 아프고.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합니다. 걸음걸이도 부자유스럽고 늘 얼굴이 부어 있고 숨소리도 고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뵐 때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1966년 3월 28일 보길도 25살 김광신 노총각이 이웃동네 21살 해녀 마영단 아가씨를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결혼을 했는데 세월은 두 분을 백발 노인으로 만들었습니다.

할머니는 16살부터 해녀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 시절에는 변변한 해녀복도 없고 겨우 광목천으로 만든 해녀복 이름을 ‘잠뱅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딸이 물질하러 가면 어머니들은 정성스럽게 잠뱅이를 만들어 입혀서 그나마 추위와 위험에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돌이켜보면 가난했던 시절, 모두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 해녀들은 오리발이라든지, 다른 안전화를 신고 작업을 하지만 예전에는 맨발로 물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해녀들의 발은 날카로운 굴 껍질과 돌에 찔린 상처로 얼룩져 아팠지만 가난한 가정에 도움을 주려고 피를 흘리면서도 물속에 뛰어들었다 합니다.

해녀 축제에서 잠뱅이를 입은 해녀들이 행진하고 있다. 국민일보DB

물속으로 깊이 잠수해 보통 10m를 내려가면 해삼 멍게 전복 소라 등 어패류를 따서 가슴에 가득 안고 올라와야 합니다. 숨이 금방 멈출 것 같은 상황이라 조금이라도 빨리 솟아 올라오려면 바닥을 발로 차야 하는데 맨발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차면 날카로운 바위에 수없이 찔려 늘 상처를 달고 살았다 합니다.

지금은 물 위에 띄우는 주머니는 스티로폼과 좋은 플라스틱이 있지만 옛날에는 고주박을 사용했습니다. 고주박에 구멍을 뚫고 속을 파내 입구를 봉하면 속이 비어 있어서 물에 뜨는 것이지요. 고주박도 파도에 수없이 부서지기 일쑤여서 오동나무를 말려서 여러 개를 묶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모두 오늘날에 비하면 허술한 장비였습니다.

특별히 위험한 것은 욕심이라고 합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잡으려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참으며 한 개라도 더 따려고 하다가 미처 물에서 올라오지 못하고 기절하기도 하고 큰 문어를 욕심내 잡으려고 달려들면 문어가 사람을 휘감게 되는데 그러면 꼼짝을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또 큰 전복을 잡으려고 전복 바닥에 손을 넣으면 손이 돌에 붙어 올라오지 못해 해녀들이 사고를 당한다고 합니다.

전복이나 문어가 해녀 어머니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고 하니 자연의 힘은 소름이 돋을 무섭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어머니들이 목숨 걸고 잡아 오면 가족들이 먹을 보리쌀로 바꾸어 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옛날 아버지들이 어린 딸이 잡아 온 해물을 술과 바꾸어 마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동광교회의 보석 같은 역할을 감당하시지만 흰 머리가 되시기까지 이분들이 걸어온 길은 멀고도 험한 나그네 길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보길도는 이런 분들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해녀들은 집안에 필요한 돈이 당장 손에 들어오기에 동생들 뒷바라지에 바쁘고 자신의 몸도 돌보지 못하고 차가운 바다를 헤엄치면서 젊은 시절을 살았다고 하십니다. 물질하지 않는 날에는 땔나무를 줍고 농사일을 하느라 밤이 늦도록 일을 했는데 그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알고 불평 없이 모두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마 할머니는 그렇게 힘든 해녀 일을 시집와서도 그대로 하셨다고 합니다. 시댁 식구를 책임지는 삶이 처녀 때 친정에서 살던 것보다 더 힘들게 살아왔다는 얘기에 섬 목회자를 눈물 나게 합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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