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주의자’인 박병석 전 국회의장은 “12.3 비상계엄 사태로 현행 대통령제가 안고 있는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났다”며 “이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종언을 고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제왕적 권력을 제도적으로 견제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일탈이 일어난다. 그 일탈을 막고자 하는 게 개헌의 목표”라며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다만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 이후 정치적 혼란이 극심한 현 시점에서 정략적으로 개헌 논의를 꺼내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다.
박 전 의장은 개헌과 동시에 정치 문화 전반을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그는 “대통령과 총리가 권한을 나누기만 해서는 지금과 같은 극단적 대립이 또다시 반복될 우려가 있다”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양원제를 도입하거나, 선거제 개혁을 통해 다당제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승자독식의 구조를 해체하고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21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지막으로 지난 5월 말 정계에서 물러난 그는 한동안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고사해왔다. 박 전 의장은 “현실 정치를 떠난 뒤에는 가급적 현안에 대한 언급을 삼가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래도 경험을 가진 선배들이 의견을 내는 게 옳지 않겠는가”라며 퇴임 후 첫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설명했다.
박 전 의장은 “비상계엄 사태 이후 나라가 절체절명의 총체적 위기 상태”라며 여야를 향해 적극적인 정치의 복원도 요구했다. 탄핵 정국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여당의 진솔한 사과와 반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동시에 야당의 연이은 탄핵소추로 사상 초유의 ‘권한대행의 대행’ 체제가 들어선 상황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일을 만들어 내는 게 바로 정치적 대타협”이라며 “지금이야말로 정치가 작동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정국 수습의 핵심 키워드로는 ‘불확실성의 신속한 해소’를 꼽았다. 박 전 의장은 “경제·외교·안보 등 정말 총체적 난국이다. 거친 눈보라가 몰아치는 캄캄한 밤에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라며 “지금의 불확실성을 빨리 제거하기 위해서는 헌법재판소가 제대로 작동해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여부에 대한 결론을 최대한 빨리 내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서구갑)에서 내리 6선을 지낸 박 전 의장은 인터뷰 내내 ‘무신불립(無信不立)’을 강조했다. 그는 “국회의원 24년 동안 6개의 정권을 지켜봤는데, 권력은 무상하고 정권은 유한하다”며 “시류에 따르거나 인기에 영합하면 결국엔 후회하게 돼 있다. 국가와 국익을 가슴에 두고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신임을 잃은 정부도 국정을 끌고 갈 수 없다”며 “헌법재판소 결과가 어떻게 나온다 한들 윤 대통령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박 전 의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27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그의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박 전 의장과의 일문일답.
-21대 전반기 국회의장 재임 시절 거듭 개헌을 강조했다. 당시 개헌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유와 그 판단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최근 계엄 사태를 겪으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꿔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커졌다. 개헌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지고 절박해졌다. 현행 헌법 체제는 이른바 ‘87년 체제’다. 논의를 거쳐 실제 개헌이 되려면 최소 약 40년이 흐르게 된다. 한 세대 이상 흐른 것이다. 국민소득만 해도 1987년에 3500 달러에서 지난해 3만6000 달러로 10배 이상 뛰었다. 국제 정세도, 시대적 요구도 많이 변했다. 지금껏 논의는 충분히 이뤄졌다. 개헌은 이제 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결단의 문제다. 헌법학자나 정치인들은 개헌 필요성에 압도적으로 공감을 하고, 최근에는 국민 여론조사에서도 개헌 찬성이 50%를 넘어가고 있다.”
-탄핵 정국에서의 개헌 논의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나온다.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정권 초에는 개헌이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빨아들인다는 이유로 안 한다. 그러다가 정권 중반기가 넘어가면 개헌 얘기를 꺼내는데 그때는 추진 동력이 부족하다. 개헌은 반드시 정권 초에 해야 한다. ‘선 집권 후 개헌’은 성공한 전례가 없다. 따라서 ‘선 개헌 후 대선’이 성공할 수 있는 공식이다. 먼저 대선 후보들이 개헌안을 제시하고, 투표를 통해 평가받는 것이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선 개헌’을 주장하기엔 너무 혼란스럽기 때문에 먼저 헌법재판소가 정상화 된 이후에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개헌 논의가 현시점에서 국정 혼란을 수습하는 데 영향을 주면 안 된다. 마치 혼란과 개헌을 교환하려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면 안 된다. 국가적 대위기 속에서 개헌 논의가 마치 탄핵 국면을 빗겨나가는 데 이용돼서는 안 된다.”
-개헌의 핵심은 권력 구조 개편인가.
“이번 비상계엄으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민주주의의 모범국에서 완전히 추락하게 됐다. 이로써 현행 대통령제가 안고 있는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종언을 고해야 할 때다.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국회로 나누는 수평적 권력 분산. 또 하나는 지방 분권이라는 수직적 권력 분산. 하지만 대통령의 권한을 나눠 국회로 가져온다고 해도 극단적으로 서로 대립할 경우 이를 스스로 견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래서 양원제를 도입하거나, 연합 정치가 가능한 다당제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대통령과 총리가 권한을 나누기만 해서는 극단적 대립이 반복될 우려가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게 상원의 역할이다. 지금과 같은 격동의 시기에도 상원이 원로원의 역할을 했다면 중재가 가능했을 것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 의견도 나온다.
“대통령 중임제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 중임제가 과연 제왕적 대통령제를 끝낼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대통령이 연임할 경우 독단적 행동이 견제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시키고, 의회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면서도 이를 조정할 수 있는 ‘제도’라고 본다.”
-87년 체제에서 대부분의 대통령이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좋은 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대통령제와 좋은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 즉 제도와 사람의 결합이다. 제도를 잘 갖춰놓으면 사람의 부작용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제도를 고치는 것이다. 퇴임 이후 행복한 대통령이 별로 없다. 탄핵을 당하기도 하고, 불행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결국엔 성공한 대통령이 드물다는 것은 결국 제도의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은 스스로 확대되고 스스로 강화시키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권력을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견제하고 제어하지 않으면 일탈해버리고 만다. 그 일탈을 막고자 하는 게 개헌의 목표다.”
-권력 구조 개편 외에 또 포함돼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이 ‘성장 사회’였다면 앞으로는 ‘성숙 사회’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 기후위기, 저출생 고령화, 환경권, 인격권, 지방자치 같은 것들이 함께 논의되면 좋겠다. 하지만 개헌이 시급하다면 먼저 권력 구조에 한해 부분적으로 1차 개헌을 한 뒤, 그다음에 전면적으로 2차 개헌을 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 국면까지 왔다.
“지금 현 정국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불확실성의 해소다. 현 상황은 거친 눈보라가 몰아치는 캄캄한 밤에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과 같다. 안보·외교·경제 등 정말 총체적 난국이다. 이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헌법재판소가 제대로 작동해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여부에 대한 결론을 최대한 빨리 내려줘야 한다. 그래야 불확실성이 제거되는 것이다. 최근의 권한대행 탄핵 의결정족수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헌법에도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헌법과 법률의 빈틈이 있을 때 이를 보완하는 게 바로 정치의 역할인데,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계엄 사태 수습에 필요한 것은.
“무신불립을 강조하고 싶다. 신뢰가 없으면 설 수가 없다. 국민의 신임을 잃은 정부도 국정을 끌고 갈 수 없다.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윤 대통령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겠나. 누가 뭐라고 해도 국정 운영의 최종 책임은 대통령과 여당에 있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공동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은 진솔한 사과가 없다. 그런 반성의 행동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로부터의 신뢰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 한국에 대한 신뢰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야당은 ‘연쇄 탄핵’으로 돌파하려는 모습이다.
“야당도 계속되는 탄핵에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한다. 정치는 타협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일을 여는 게 바로 정치적 대타협이다. 지금이야말로 정치가 작동해야 할 때다. 진정한 정치지도자들의 모습이 절실히 필요하다. 21대 국회에서 ‘검찰 개혁법’을 두고 모두가 여야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국엔 중재안을 마련했고, 물론 나중에 일부 수정은 됐지만 여야 지도부도 이를 수용했다. 그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진솔하게 만나서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 막스 베버는 정치인의 3대 요소를 균형감각, 책임감, 열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균형감각과 책임감이 부족해 보인다. 여야를 떠나 그 얘기가 자꾸 떠오른다. 시류에 따르거나 인기에 영합하면 항상 후회하게 된다. 지금 국민과 역사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여야의 극단적 대치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최근 두 권의 책을 집중해서 읽고 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가 전편에 속한다면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후편에 해당한다. 책 속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정치인과 정당이 포퓰리스트와 손잡을 때, 정치인들이 경쟁자를 ‘반국가세력’이라고 낙인찍을 때,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이 음모론을 제기하며 결과에 불복할 때, 의회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탄핵을 추진할 때 민주주의가 무너진다고 한다. 주류 정당이 극단주의를 용인하고 모호한 입장을 취할 때 극단주의는 합법과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고 온다고 지적했다. 두 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김판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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