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응답하라 1980’쯤이던 시절. “대학 록밴드에서 리더 겸 키보드를 맡았어요. 수첩에 가요 팝송 영화음악 제목을 200~300개 써서 다녔어요. 누가 제목을 얘기하면 어떤 곡이든 바로 연주가 가능했죠. 친구들이랑 피아노가 있는 경양식집에 가서 ‘사장님, 피아노 쳐봐도 돼요?’ 그렇게 시작하면 손님들 반응이 좋으니까 저는 한두 시간 연주를 하고, 친구들은 사장님이 내준 맥주를 마시곤 했죠.”
어느 록그룹 멤버의 이야기일까 싶지만 주인공은 김효근(61) 이화여대 경영학부 교수다. 김대중정부 시절 각광받았던 ‘신지식인’이란 용어와 개념을 만들었고 한국지식경영학회장을 지낸 학자이다. 또한 가곡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눈’ ‘내 영혼 바람 되어’ ‘첫사랑’ 같은 인기곡을 만든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의 연구실에 들어서자 정면에 있는 컴퓨터와 그 아래에 놓인 건반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오른쪽은 전공서적이 빼곡한 학자의 공간, 왼쪽은 오디오와 CD가 있는 음악가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작곡하는 경영학자’라는 그의 정체성처럼 절묘하게 균형 잡힌 배치였다.
-지금까지 6장의 앨범과 50곡 가까운 곡을 발표하셨는데 직접 꼽으시는 대표곡은 어느 곡인가요.
“아무래도 ‘눈’이죠. 지난해가 발표 40주년이어서 제 곡으로만 구성된 공연을 전국에서 일곱 번 했어요. 저작권 데이터로 보면 ‘내 영혼 바람 되어’가 1등이에요. 뮤지컬 배우 박은태씨가 TV 프로그램에서 부른 동영상이 730만뷰를 넘겼고요. ‘첫사랑’은 드라마 ‘펜트하우스’에서 성악가인 주인공이 노래하는 장면으로 몇 번 방송된 뒤 더 알려지기 시작했죠. 푸시킨의 시에 곡을 붙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도 코로나 힐링송처럼 알려져서 요즘 사랑받고 있고요.”
‘눈’은 김 교수가 작사‧작곡해 서울대 경제학과 3학년이던 81년 제1회 MBC 대학가곡제에서 대상을 받은 곡이다. 음대생이 아닌 그의 수상 소식이 적잖이 화제가 됐지만 그는 대학원 진학 후 미국 유학을 떠났고 92년 이대에 부임한 후에도 연구에만 전념했다. 그가 음악과 거리를 두는 동안 ‘눈’은 히트곡이 됐다. 음악 교과서에 실리고 주요 음대 입시 지정곡이 돼 많은 성악 전공자들이 부르게 됐다. ‘가곡의 여제’ 소프라노 바버라 보니가 98년 ‘자화상(Portrait)’ 앨범을 발매하면서 한국 가곡 5곡을 수록했는데 그중 한 곡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시작하셨고 학교 합창단과 교회 성가대가 음악적 토대가 됐다고요.
“부유했던 건 아닌데 아버님이 피아노를 사주셨어요. 그런데 병으로 쓰러지셔서 사춘기에 피아노를 독학하고 동네에서 기타를 배웠어요. 중학교 합창단 지도 선생님이 드보르작 ‘신세계 교향곡’을 LP판으로 들려주셨는데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구나 싶었죠. 또 당시의 성가대 음악은 바흐 헨델 비발디 같은 클래식이 주류였어요. 스펀지 같은 때니까 막 빨아들였죠. 중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10년은 음악을 끼고 살았던 것 같아요. 집은 어려웠어도 음악이 다 내 것 같고 행복했어요.”
대학도 작곡과로 진학하려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아끼던 12현 기타가 마당에 던져져 박살이 났다. 법대에 가라는 아버지와 중간 지점인 경제학과로 타협이 됐고, 대학 입학 후에 음대 수업을 들으면서 작곡 기법과 음악 이론을 배웠다.
-록밴드를 하셨으면 대중음악도 많이 경험하셨을 텐데요.
“트로트도 좋아하고 가요는 신승훈 김동률 김건모 이적 유희열씨 음악 좋아합니다. 밴드에서는 딥 퍼플, 유라이어 힙, 퀸 같은 그룹의 곡을 연주했고요.”
-그런데 가곡이 제일 좋으셨던 거네요.
“운명처럼 저에게 가장 잘 맞은 장르였어요. 중학교 1학년 합창단에서 처음 반주를 맡았던 곡이 ‘국화꽃 저버린 겨울 뜨락에~’로 시작하는 ‘고향의 노래’였어요. 이 곡이 제 마음에 쏙 들어와서 그때부터 가곡을 찾아 듣게 됐어요. 성가대에서 성악과를 지망하는 누나 형님들이 반주를 부탁해서 이탈리아 독일 한국의 명가곡을 접할 기회도 많았어요.”
김 교수가 본격적으로 작곡 활동을 재개한 것은 2007년부터다. 김동진 최영섭 선생 등 원로들의 작곡 모임에 초대를 받은 게 계기가 돼 ‘천년의 약속’ ‘하나 되어 영원하라’를 발표했다. 그런데 그새 너무 얇아진 가곡팬층에 충격을 받았고, 이대로는 한국 가곡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하긴 80년대에는 가곡의 인기가 워낙 대단했었죠.
“KBS 9시 뉴스 직전에 성악가들이 고궁을 배경으로 가곡을 노래하는 걸 틀어줬어요. 가곡 뮤직비디오였죠. ‘가고파’ ‘비목’ ‘선구자’ ‘보리밭’ ‘님이 오시는지’ 같은 곡은 전 국민이 아는 노래였어요. MBC ‘가을맞이 가곡의 밤’ 공연에 못 가면 지성인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죠. 성악가들이 인기를 누린 건 물론이고 저도 대학가곡제 이후에 거의 매일 팬레터를 받았으니까요. 그게 80년부터 95년까지 15년, 짧게 보면 92년까지 12년이었어요.”
-가곡의 전성기가 길지 않았네요.
“경영학자로서 직업병이 도져서 왜 가곡이 음악 소비자들에게 외면받는지 진단을 해봤어요. 가곡계 한쪽에는 대중이 소화하기 어려운 난해한 현대음악 어법으로 곡을 쓰는 작곡과 교수님들이 계셨고, 그 반대쪽 재야 작곡가 선생님들은 70~80년대 방식 그대로 작곡을 하고 계셨어요. 더구나 대중음악계에서 92년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파격적인 혁신이 있었으니 가곡은 더 매력을 잃은 거고요. 그래서 저는 가곡의 강점인 시와 선율의 서정성을 살리고 약점인 화성과 리듬을 세련되게 보완하는 해결책을 구상했어요. 그렇게 작전을 짜서 2010년 1집 앨범 ‘내 영혼 바람 되어’를 내놓았죠.”
-그때 가곡 대신 ‘아트팝’이란 이름도 만드신 거죠.
“옛날 가곡과는 다른데 뭐라고 불러야 할까 생각했어요. 가곡의 예술성은 그대로 가져간다는 의미로 ‘아트’, 거기에 대중성을 접목한다는 뜻으로 ‘팝’, 그렇게 브랜드를 만든 거죠.”
-반응은 어땠나요.
“처음 1, 2년 동안은 클래식계에서 좀 불편해했어요. ‘천년의 약속’에 드럼을 썼더니 팀파니를 쓰지 웬 드럼이냐, 이게 발라드지 가곡이냐, 이런 반응이 있었어요. 라디오 가곡 프로그램에서도 3년 정도 후에야 방송이 됐어요. 금지곡 아닌 금지곡이었죠. 다행히 젊은 작곡가 그룹에서 아트팝을 받아주기 시작했어요. 최진 작곡가의 ‘시간에 기대어’, 윤학준 작곡가의 ‘마중’, 이원주 작곡가의 ‘연’, 그리고 저까지 작곡가 4명의 히트곡이 시차를 두고 탄생하면서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김 교수는 지난해 11월 오페라 ‘안드로메다’를 대전 예술의전당에서 초연했다. 좋은 반응을 얻어 올해 다시 무대에 올리는데 그는 이 작품도 ‘아트팝 창작 오페라’라고 명명했다.
-대부분의 음악팬들은 듣는 것에서 그치죠. 부르거나 연주를 하기도 하지만 작곡은 또 다른 차원인 것 같은데요.
“그때는 악보가 없던 시절이라 음원을 듣고 직접 악보로 옮겼어요. 6~7년 넘게 모방 학습이 진행되면 패턴 인식이 되잖아요. 요즘으로 치면 머신러닝이죠. 데이터를 많이 학습하면 어떻게 했을 때 듣기 좋은 곡이 된다는 걸 알게 되죠.
그리고 자기가 만든 곡이나 시, 그림은 누가 뭐래도 큰 의미예요. 그런 창작의 기쁨을 한 번이라도 경험하면 계속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그랬으니까. 지금 어떤 대선 후보도 문화예술 얘기를 안 하시잖아요. 그분들은 문화예술로 행복해 본 경험이 많지 않으신 것 같아요. 그랬다면 모두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 공약을 발표했을 텐데요. 우리가 유럽처럼 오랜 생활예술의 역사는 없지만 아트 DNA가 있거든요. 그 DNA를 북돋아 주고 삶이 문화예술 친화적이 되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이 됐으면 해요.”
-경영학자와 작곡가라는 두 정체성을 갖고 계신데, 학자로서의 보람과 예술가로서의 기쁨은 서로 다른가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독창적인 연구 주제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저에게는 경영학이 음악과 똑같아요. 제가 엉뚱한 창작을 한 게 하나 있어요. 지금까지의 경영방식은 과거의 데이터를 가지고 최적의 의사결정을 하는 것인데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것을 만들 때는 과학이 아니라 창작을 하는 예술가의 머리가 필요한 거죠. 그래서 저는 경영을 예술 행위처럼 해야 한다는 ‘경영예술’을 주장하고 있어요. 경영을 예술적으로 하면 소비자를 감동시키는 게 목표가 되고, 제품과 서비스가 소비자를 감동시키면 당연히 이익이 따라오죠. 경영예술론을 통해 제 음악 활동과 연구 활동이 시너지를 내기 시작했어요.”
김 교수는 최근 세 번째 정체성을 새로 얻었다. ‘아트링커’라는 국내 최초의 예술 종합 플랫폼을 운영하는 스타트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화여대 기술지주회사의 자회사로 선정돼 교수이면서 동시에 주식회사 아트링커의 대표이사로 발령이 난 지 갓 한 달이 됐다.
“사람들을 예술과 연결하고, 예술가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을 만들었어요. 앱과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자신이 들은 음악과 관람한 공연, 전시를 앨범처럼 기록할 수 있어요. 예술가들은 자기 작품을 공개하고 판매하거나 레슨을 할 수 있고요. 특허를 낸 비밀명기는 공연 팸플릿을 핸드폰으로 보고 저장할 수 있게 한 ‘아트북 서비스’에요. 공연장들은 매일 인쇄물을 많게는 수천장씩 찍지만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가거든요. 핸드폰에서 보게 되면 공연장은 팸플릿 인쇄비를 줄일 수 있고 나무 수만 그루를 살릴 수 있죠.”
그의 곡은 아름답고 대중적인 선율과 서정적인 가사의 완벽한 조합으로 사랑받는다. 가곡은 원래 시에 선율을 붙이는 장르이지만 그는 가사도 직접 쓴다. 그런 그가 기존의 시에 곡을 붙인 드문 경우가 ‘내 영혼 바람 되어’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인데, 두 곡의 공통된 메시지는 위로였다.
“2007년에 미국 인디언의 시 ‘천 개의 바람(A Thousand Winds)’을 원문으로 받았어요. ‘내 무덤에서 울지 말라’로 시작되는 시인데 미국 출신 교수님에게 시의 주제를 물었더니 희망이라고 했어요.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제가 가사로 번역했는데 세월호 추모곡으로 많이 불렸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도 오랫동안 언젠가 곡으로 만들어보고 싶던 시였어요. 저는 위로 희망 사랑 행복 같은 키워드들을 많이 담아요. 외롭고 힘들 때 제 음악을 곁에 두고 기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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