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리노 동계올림픽 기수 이보라
“개인적으로 엄청난 영광
북한 선수들 갈수록 다정”
2005 마카오 동아시안게임 기수 양희종
“국적 다르지만 같은 마음
북 선수와 가벼운 대화 나눠”
2003 대구유니버시아드 기수 최태웅
“인터뷰 등 성가신 일 많았지만
한정인이 컨디션 물으며 챙겨줘”
“내가 전부 들 테니, 손 흔들면서 잘 따라오세요.” 2006년 2월 11일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이탈리아 토리노 올림픽스타디움 뒤편에서 북한 피겨스케이팅 대표 한정인은 대한민국 스피드스케이팅 대표 이보라(32)에게 이렇게 말했다. 둘은 ‘코리아(COREA)’가 호명될 때 대형 한반도기를 들고 맨 앞에서 걸어갈 기수들이었다.
둘에게 주어진 지침은 “깃발이 꼬여 한반도가 보이지 않는 일이 없도록 신경써서 입장하라”는 것이었다. 받아든 한반도기는 예상 외로 무거웠다. 이보라가 “너무 무겁다”고 말하자 한정인은 “내가 들 테니 손만 갖다 대라”고 권했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이보라는 “매우 떨린다”고 말했다. 한정인은 “긴장하지 말고 잘 하자”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보라는 10일 “선수촌 식당에서 마주친 것이 끝이었고, 한정인에게 마지막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보라는 당시 개막식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야 갑자기 기수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원래는 남성 선수가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기로 계획돼 있었다. 하지만 선수단의 선수촌 입촌 이후 남북의 공동입장이 결정됐고, 대한민국에서 여성, 북한에서 남성 기수를 내세우기로 정해졌다.
이보라는 처음에는 기수를 맡는 일이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20세의 어린 나이였던데다 첫 출전하는 올림픽에서 덜컥 가욋일을 부여받은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차분히 경기를 준비해야 하지만 성가신 일도 많았다. ‘코리아’의 공동입장이 외신의 관심을 끌다 보니 이보라는 한정인과 이곳저곳 언론 인터뷰를 다녀야 했다. 그런 때 한정인은 “시합 준비는 잘 되느냐” “컨디션은 어떻느냐”며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런 이보라는 입장하는 순간 ‘다시 오지 않을 뜻깊은 일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랑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는 둘에게 토리노 올림픽스타디움의 모두가 큰 박수를 보냈었다. 이보라는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만도 아닌 남북의 공동입장을 대표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공동입장이 이뤄진다면,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영광스러운 자리임을 기수가 알았으면 한다”고도 덧붙였다. 당시 서로 뒤섞여 공동입장을 기다리던 남북 선수단 56명은 서먹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였다. 이보라는 “아무래도 선수들끼리라서 공통된 화제가 있었던 듯하다”고 말했다.
2003년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에서 배구선수로서 남북 동시입장을 대표했던 최태웅 감독(42·현대캐피탈)도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다. 최 감독은 “선수들끼리는 서로 겪는 고충도 비슷하고 통하는 게 있다”고 말했다.
최 감독은 함께 입장한 북한의 여자펜싱 선수 김혜영에 대해 “서로 국적이 다르지만 한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고 회고했다. 그는 김혜영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고, “힘들지 않느냐” “경기장은 맘에 드느냐”는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떠올렸다. 공동입장 당시 선수단에는 “김일성 배지를 받으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이 하달됐다고도 한다.
2005년 마카오 동아시안게임에서는 농구선수들이 남북을 대표해 한반도기를 들었다. 대한민국 선수단에서는 양희종(34·안양KGC)이, 북한에서는 유현순이 나섰다. 양희종은 “남북 공동기수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며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양희종과 유현순도 한반도기가 무거워 고생이었고, 여름철이라서 예행연습마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신장이 좋아 보폭이 큰 둘에게는 “뒤따르는 선수단의 인솔까지도 고려하라”는 지침이 내려졌었다. 양희종은 “처음에는 북한 선수와 함께 한다는 점이 걱정되기도 했는데, 얘기를 나눠 보니 생각보다 다정했다”고 말했다.
당시 선수단에게도 말투와 억양을 주의하라는 방침이 내려졌다. 양희종은 “(유현순에게) 궁금했던 북측 생활에 대해 물어봤는데, 의외로 다정하고 흔쾌히 말해주더라”고 했다. 북한 선수라 해도 결국 별반 다를 것이 없더라는 것이 양희종의 기억이다. 유현순은 유난히 “우리는 한민족이다. 같은 민족이다”라는 말을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이경원 박구인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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