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은 평양 소학교 6년간 같은 반이었지”
“앞으로 그릴 작품 더 많아
건강 비결? 정신상태가 중요”
“중섭이(이중섭)는 내 소학교(평양) 때 친구야. 6년 내내 같은 반이었지.”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검버섯이 눈에 띄었지만 귀공자처럼 희고 단아한 얼굴에 연도까지 하나하나 집어낼 정도로 기억력은 또렷했다. 유년시절에 대해 얘기할 때는 노화백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생존 최고령 현역 화가 김병기(98). 1916년에 태어나 1세기를 살아온 그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산증인이다. 평양 갑부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고희동, 김관호에 이은 서양화가 1세대 김찬영(1893∼1960)이다. 그 역시 일본에 유학을 가 김환기(1913∼1974) 이중섭(1916∼1956) 유영국(1916∼2002) 등과 어울렸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였지만 우리 미술계에서는 한동안 잊혀진 존재였다. 1965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참가했다가 그 길로 뉴욕에 홀연히 정착했기 때문이다.
재미화가 김병기의 화업 60년을 정리하는 회고전 ‘감각의 분할전’이 내년 3월 1일까지 마련됐다. 전시가 개막된 2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그를 만났다.
이중섭은 도쿄문화학원 동기이기도 했지만 평양의 유년시절 서로의 집을 오가던 동갑내기 친구였다. “소학교 때 우리 집은 아버지가 산 영국의 미술잡지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지. 그걸 중섭이랑 함께 보곤 했어요.”
이중섭과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어느 날 이중섭이 몽당붓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뭐하는 줄 아나. 수채화 그릴 때 물기가 많아 곤란할 때 이걸 갖다대면 물기를 쪽 빨아당겨.”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 때 그런 테크닉까지 알았으니 중섭이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린 게야”라고 말했다.
추상의 길로 들어선 계기를 물었더니 가족사를 털어놨다.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 대해 반항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시절이 있었어요. 그것이 아방가르드로 가는 계기였지. 아방가르드가 하나의 반역이니까요.”
전시에는 신작 10여점 등 평생 그린 70여점을 엄선해 선보인다. 1986년 가나아트에서 21년 만에 첫 귀국 전을 가진 이래 몇 차례 개인전을 했지만 대규모 회고전은 처음이다.
회고전 소감을 묻자 서운하다는 표정이었다. “평생 그린 걸 다 모은 거라고 하면 안 되지요. 앞으로 그릴 작품이 무수히 있는데….”
향후 작품 세계에 대해서는 “그동안 흑백 많이 썼지만 앞으로는 색채를 다채롭게 쓰고 싶다”며 “오방색적인 다채로움이 한국에는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는 지금도 현역이다. 석 달 전에 그린 작품도 출품됐다. 그래서 건강 비결이 궁금했다. “비결은 없다. 정신상태가 중요한 거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으로서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그는 “뜨뜻미지근하게 사는 건 일종의 죄악”이라며 “현재는 항상 중요한 순간이고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하지 않느냐. 그래서 조금 적게 먹고 충분히 자고 충분히 운동하고 그렇게 상식적으로 산다. 이런 걸 통제하는 게 정신상태”라고 설명했다. “연이 떠있으면 나는 하나의 연이고, 그걸 조종하는 건 하나님입니다. 그 관계를 팽팽하게 해야지요. 늘어지면 끊어지니….”
인터뷰 내내 그는 흥분돼 보였다. “이처럼 멋있는 나라를 두고 어디에서 있었나라는 걸 느꼈다. 돌아오니 반갑다”는 그는 소원 하나를 말하고 인터뷰를 끝냈다.
“현재는 미국국적이지만 한번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잊은 적이 없어요.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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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 여는 100세 바라보는 최고령 화가 김병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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