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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줍던 노부모에 장애인 자녀 돌보라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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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폐지 줍던 일흔 중반 어머니는 석 달 전 허리 수술을 한 뒤 바깥출입조차 힘들어졌다. 여든둘 아버지는 몇 년째 심장약을 먹는다. 숨이 차서 폐지 리어카를 끄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집배원으로 퇴직한 아버지는 큰아들 사업자금을 댔다가 빈털터리가 됐다. 다행히 집 한 채는 남았다. 서울 광진구 자양동의 시가 2억원짜리 2층 단독주택. 이영애(48)씨는 “노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이씨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입고 먹는 일상이 불가능한 1급 지체장애인이다. 어쩌다 인권교육 강사로 나가 7만∼8만원씩 벌기도 하지만 고정 수입은 아니다. 여든 전후 노부모와 중증장애인 이씨 중 일해서 생활비를 벌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 사람의 한 달 총 수입은 1층 방에서 나오는 월세 25만원과 부모의 기초노령연금 15만8600원, 이씨의 장애인연금 11만8000원을 합쳐 50만원 남짓이 전부다. 공과금 20만원 내고 나면 세 사람 반찬값 대기도 빠듯한 액수다.

한때 이씨는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선정돼 독립할 꿈에 부풀었다. 수급권자만 되면 생활비(생계·주거급여)뿐만 아니라 병원비(의료급여)를 받고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할 때 내는 본인 부담금도 면제받을 수 있다. 일 못하고 수입도 없는 중증장애인이니 수급권자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인 듯싶었다. 주민센터 담당자는 고개를 저었다. “부양 의무자인 아버지에게 집이 있어서 어려울 겁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르면 소득인정액(소득+재산의 소득환산액)이 월 290만원 이상(4인가족 기준)인 직계혈족과 배우자에게는 부양 의무가 부과된다. 이씨의 부양 의무자가 일할 수 없는 70, 80대라는 점, 재산도 현금화가 불가능한 거주 주택이라는 사실 같은 건 고려되지 않는다.

1급 뇌병변 장애를 가진 하상윤(41)씨는 30여년 연락을 끊고 산 아버지 때문에 수급권을 거부당했다. 하씨는 어릴 적부터 살던 장애인 생활시설의 비리를 폭로한 뒤 현재는 체험홈(장애인 자립을 돕기 위한 가정 형태의 소규모 거주시설)에 머물고 있다. 체험홈 최대 거주기간은 2년이다. 이 기간이 끝나는 올해 12월 하씨는 당장 갈 곳이 없다. 일을 하지 못하는 하씨가 홀로 설 방법은 한 가지,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씨 역시 부양 의무자인 아버지의 존재가 걸림돌이다. 하씨는 “도와준 적도 없고 연락도 안 하는 아버지에게 무슨 부양을 받느냐”며 답답해했다. 정민구 노들장애인야학 교사는 “시설 거주 장애인 중 상당수는 가족과 연락이 끊긴 채 몇 십년을 지낸다”며 “막상 시설을 나갈 때는 가족 때문에 수급권을 못 받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기초생활보장제의 부양 의무 조항은 지난 몇 년간 무수한 희생자를 낳았다. 수십 년 전 연락이 끊긴 가족, 이혼한 배우자의 자녀, 고령의 부모 등 법적 의무는 있으나 부양 능력도 의지도 없는 가족 때문에 빈곤의 사각지대에 빠진 이들이 줄줄이 목숨을 끊었다. 정부가 공식 인정하는 사각지대가 무려 117만명이다. 국회에 계류 중인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을 놓고 설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문가들과 야당,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일단 “노인과 장애인부터 부양의무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노인은 부양 의무를 면제해주고 장애인의 수급 자격을 따질 때는 부양 의무자의 존재 자체를 고려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직 의견차는 큰 편이다. 시민단체는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반면 정부는 부양 의무자를 선정하는 소득인정액 기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선하자는 주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정부의 개편안 작업에 참여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노대명 기초보장연구센터장은 “노인과 장애인에게 부양 의무를 적용하는 건 우리 사회의 도덕의식에도 맞지 않는다. 일단 이것부터 푸는 게 옳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소득인정액 기준을 완화하자는 게 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교육급여의 경우 폐지 여부를 검토 중”이라며 “인구 집단별 선별 폐지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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