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의 여행] 김삼웅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Է:2013-10-2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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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의 여행] 김삼웅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올해는 홍범도 장군 서거 70주년이다. 하지만 그의 유해는 광복 68주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묻혀 있다. 왜 그의 유해는 조국으로 송환되지 못하고 있는가.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저자의 일관된 관심은 여기에 있다.

그 이유를 그는 몇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국내 보수적 역사학계의 배타성이다. 보수적 학자들이 발행해온 ‘한국사시민강좌’는 2010년에 발행한 47호 특집에서 ‘대표적 독립운동가 12인’을 선정할 때 홍범도를 제외했다는 것. 둘째, 홍범도는 평양 출신이기에 남한에 홍범도를 기릴 만한 후손이 없고 나아가 국내 독립운동연구가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점. 셋째, 홍범도는 머슴 출신이어서 학문적으로 연구할 대상이 못 된다고 여기는 학자들이 있다는 것. 넷째, ‘저명한 조선 빨치산 대장’이라는 호칭이 주는 뉘앙스, 즉 ‘빨치산’이라는 호칭 자체가 터부시되어온 국내 여론에 밀려 그의 공적이 상당 부분 묻히고 말았다는 것. 다섯째, 그가 한때 레닌과 만나서 권총을 선물로 받고 볼셰비키에 입당한 일로 인해 좌파 독립운동가로 몰렸다는 점이 그것.

게다가 홍범도는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건너가면서 우리 역사와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하지만 그는 1937년부터 1943년 10월 25일 75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엄연히 생존해 있었다.

이주 초기 홍범도에게는 카자흐스탄 시르다리야 강 근처의 잘 아르이크 마을이 배정되었다. 여기서 반년쯤 지내다가 이듬해 4월 초 크즐오르다로 이사했다. 당시 크즐오르다엔 한글신문 ‘레닌기치’가 있었고, 쫓겨 온 조선사범대학이 있었으며 조선극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홍범도는 이미 전설이었다.

조선극장 배우인 태장춘이 말년의 홍범도에게 파란만장한 생애를 돌아보는 ‘일지’를 쓰게 하고 이를 근거로 희곡 ‘홍범도’를 무대에 올렸을 때, 그는 “너무 추켜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평소 겸손한 품성 그대로였다. 그런 홍범도였으니 그의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독립운동사는 영원히 마침표를 찍지 못할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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