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김나래] 내 머리 밖 외장하드?

공교롭게도 5월 8일 어버이날을 끼고 1주일간 출장을 다녀왔다. 제대로 어버이날을 챙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황금연휴가 시작되던 17일 충북 단양 시댁행을 결심했다. 운전면허증 없는 남편과 사는 덕에 이번에도 운전대는 내 차지였다.

사흘 연휴이니 멀리 놀러갈 사람들은 일찌감치 출발했겠지, 생각하며 길을 나선 게 오전 11시.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찮다. 서울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올림픽대교 인근 도로부터 차들이 엄청나다. “T맵 켜서 어느 길로 가라고 하는지 봐주세요.”

T맵,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의 최강자. 국내 이용자 수만 1640만명. 실시간 교통 상황을 반영해 도착시간을 거의 정확히 예측해 준다는 점 때문에 인기가 좋다. 나 역시 신봉자까지는 아니지만 애용해 왔다. 안 막히면 2시간30분 걸리는 거리. 이번엔 4시간이면 된다고 하겠지? “어, 접속 오류라는데.” 접속자가 많나, 아니면 이 동네 네트워크 환경이 안 좋나. 영동고속도로를 탈지,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탈지 알려줘야 빨리 갈 길을 정할 텐데. T맵이 먹통이라니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갑자기 뒷목이 뻐근하며 느낌이 좋지 않다.

항상 ‘몇 시 몇 분 도착’을 예상하고 운전하다 갑자기 이 길이 얼마나 걸릴지 기약할 수 없는 형편이 되니 신경이 곤두선다. 일단 가던 길로 가 보자. 서하남IC로 진입하려는데 차들은 움직이질 않는다. T맵은 여전히 먹통이다. 옆 차량 보조석에서도 누군가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는 게 보인다. 중부고속도로에 진입하려고 차로를 바꾸는데 꼼짝 않는 차들을 보니 안 되겠다 싶어 우왕좌왕하는 사이, 갑자기 ‘서울∼춘천 고속도로’ 표지판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래, 가끔 막히면 T맵도 저 길로 안내했었지. 근데 여기도 마찬가지다. 다급하게 묻는다. “T맵은요?” “아직도 안 되는데.” 무조건 첫 번째 보이는 IC에서 빠져 국도로 가야겠다. 국도를 타니 T맵이 가동된다. 아, 다행이다. “그런데 얼마나 걸린대요?” “앞으로 4시간은 더 걸린다는데.”

허걱. 아니 대체 왜 이렇게 막히는 거야. 그제야 생각해본다. 그래, 이번 봄 유난히 주말마다 비가 많았지. 평소 휴일 외출이 잦지 않은 우리도 이렇게 나왔으니 날씨 좋은 사흘을 집에서 보낼 사람들이 당연히 적겠지. 조금만 미리 생각해 봤더라면 이렇게 대책 없이 출발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준비 소홀의 대가로 그날 7시간 넘게 운전하며 시댁까지 최장 시간 운전 기록을 세웠다.

며칠 뒤 선배에게 얘길 하자 “석탄일에는 서울 근교의 절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서울 빠져나가는 길이 다 막히는 거야. 그리고 다들 아침 먹고 그 시간대에 나서기 때문에 제일 붐비는 시간을 택한 거고. 그리고 넌 문화부 기잔데 경기도 가평에서 자라섬 페스티벌한다는 게 생각 안 나디?”

아, 그 많은 변수를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 생각할 필요를 못 느꼈던 건 T맵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설사 길이 막히면 안 막히는 길을 안내해줄 테니까. 그게 먹통이 될 수도 있다는 상황은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문득 섬뜩하다. 기기 하나에 이렇게 무기력할 수 있다니. 차 뒤켠에 고이 모셔놨던 도로지도책은 언제 치웠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점점 내 머리가 하는 일이 줄어든 것 같다. 전화번호 안 외운 지는 이미 오래다. 처음엔 단축키 20번대까지 외웠던 것 같은데 요샌 그냥 스마트폰 전화번호부에서 초성 검색을 한다. 뭘 외워, 치면 다 나오는데.

기사 쓸 때나 육아, 쇼핑 등에 필요한 정보를 검색할 때도 마찬가지다. 따로 정보를 모아놓기보다 그때그때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하고 치운다. 정리할 시간이 어딨어. 나중에 찾아보면 다 나오는데. 더구나 클라우딩 컴퓨터에, 용량 제한 없는 이메일에, 이젠 용량을 의식해서 정보를 추스를 일도 줄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에 이상이 생기면? 이 프로그램들을 가동하기 위한 네트워크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필요한 정보들이 내 머릿속에는 없는데. 예전엔 내 머리에 모든 걸 집어넣고 살았다면 이젠 어지간한 정보와 기능은 외장하드처럼 다른 기기에 심어놓고 살고 있는데. 용왕님 앞에서 ‘간’을 빼 놓고 왔다는 토끼의 말은 거짓이었지만, 내 머릿속 기능과 정보의 일부를 스마트폰에 T맵에 노트북에 나눠줬다는 말은 더 이상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실 스마트폰도 잃어버려 보고, 노트북 하드도 날려 보며 어지간한 ‘멘붕’ 상황은 다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쓰는 기기가 다양해지면서 허를 찌르는 상황도 같이 늘어나는 것 같다. 과학은 나날이 발전하고, 인간의 뇌는 노력 여하에 따라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는 ‘뇌가소성’ 얘기도 들리던데. 이번 주말엔 내 머리 밖 외장하드 말고, 온전히 내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머리를 굴려봐야겠다.

김나래 문화생활부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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