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31) 협성신학교 설립

Է:2011-10-0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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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31) 협성신학교 설립

美 남·북감리회 하나돼 첫 감리교 신학교 결실

신학교육은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 거룩한 의무로 인식되어 왔다. 유럽 최초의 기독교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제네바아카데미(1559), 두 번째 기독교대학으로 알려진 레이든대학(1574)도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1636년에 설립된 미국의 하버드대학을 비롯하여 윌리엄 메리대학(1693), 예일대학(1701), 뉴저지대학(1746) 등도 종교적 목적, 곧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의 감리교회도 학교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아펜젤러가 정동에 설립한 배재학당(1886), 이화학당, 인천에서 시작된 영화학당도 동일한 취지에서 시작된 감리교회의 교육기관이었다. 당시의 격물치지(格物致知), 곧 ‘널리 사물의 이치를 캐내어 바른 지식에 이르게 한다’는 정신은 흔히 주자학의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에서 왔다고 하지만, 교육의 필요성은 이미 19세기 이후 아시아-아프리카 선교에서 강조되어 왔다. 스코틀랜드교회의 첫 해외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 1806∼1878)는 인도 캘커타에서 1830년 7월 최초의 선교학교를 설립했다. 이는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중요한 시작으로 간주된다.

감리교 첫 신학교 ‘협성신학교’

한국감리교회는 선교학교의 설립과 함께 신학교육기관을 설립했는데, 그 첫 학교가 협성신학교였다.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이후 교세가 확장되고 교회 지도자 양성이 시급해지자 정규학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07년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비정규적인 신학교육은 이보다 앞서 시작되었다. 배재학당 내에 신학부를 둔 일도 있었고(1888), 1893년에 이미 ‘신학반’(Theological class)이란 이름으로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아펜젤러가 이 일을 주도했다. 처음에는 서울 출신 학생으로 구성했으나 차츰 지방학생들이 교육에 참여했다. 1896년 아펜젤러의 보고에 의하면 평양의 김창식, 제물포의 김기범, 강화의 이명숙 등이 교육에 참여했다.

1899년부터는 ‘신학회’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여러 지방에서 신학교육이 이루어졌다. 1900년 1월 인천에서는 조원시(G H Jones) 선교사 집에서 공식적인 2주 과정의 신학교육이 시작되었는데, 수강생은 지방 전도자 8명, 준회원 4명, 일반청년 5명 등 17명이었다. 아펜젤러, 노보을(W A Noble), 조원시, 서원보(W C Swearer) 등이 교육을 담당했다. 또 그해 11월에는 서울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턴을 중심으로 신학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때 교육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김기범, 김창식, 노병선, 문경호, 송기용, 이은승, 최병헌 등인데, 이들이 한국감리교 초기 지도자로 활동하게 된다. 신학교육은 성경만이 아니라 일반교양, 신학개론, 교리, 교회사기, 설교학, 해석학, 윤리학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의 첫 목사’ 김기범, 김창식

신학회에서 수학한 이들 중 전도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는 전도사 자격증이 수여되었다. 1901년에는 신학교육이 보다 체계화되었는데, 모든 과정을 이수한 김기범, 김창식, 최병헌에게 목사 안수를 주기로 결정했다. 즉 1901년 5월 14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국감리교 조선선교연회에서 김기범, 김창식은 두 외국인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이들이 한국에서의 첫 목사였다. 장로교의 1907년의 첫 안수보다 6년 앞선 일이었다. 이때 감리교의 목사안수는 ‘집사목사’인데, 세례를 베풀거나 결혼식을 주례할 수 있으나 성찬식을 거행할 수 있는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 초기 한국감리교회는 목사 안수를 이원화하여 먼저 집사목사 안수를 베풀고, 일정 기간이 경과한 후 시험과 심사를 거쳐 ‘장로목사’ 안수를 다시 베풀었다. 오늘의 감리교회의 준회원 목사와 정회원 목사 제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병헌은 예기치 못한 상을 당해 안수를 받지 못했으나 그 이듬해 안수를 받고 상동감리교회 담임목사가 되었고, 초기 한국감리교 신학자로 기여하게 되었다.

연합정신이 세운 협성신학교

1903년을 경과해 가면서 감리교회의 신학교육은 보다 조직화되었는데, 이때 김창식과 이은승은 강사로 참여하게 된다. 교회의 확장과 더불어 보다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했다. 1906년 11월부터 남북감리교 선교부는 연합하여 신학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수강시간을 확대하고 강사진도 개편했다. 1907년 6월 18일 개최된 북감리교 제3회 연회에서는 신학교육건이 시급한 현안으로 제기되었다. 이때 조원시 선교사는 ‘협성신학당’ 설립을 제안하여 동의를 얻었다. 같은 시기인 1907년 6월 20일부터 배재학당에서 개최된 남감리교선교부 연회도 ‘북감리교회와 연합하여 신학당을 설립하기로’ 가결했다. 1900년부터 학생을 추천하여 ‘신학회’에서 교육을 받게 했던 남감리회가 1905년부터는 교수까지 파송해 북감리회와 협력했다. 이것이 남북감리교가 연합해 신학교육기관을 세우게 된 배경이다. 이런 점에서 협성신학교를 연합신학교(The Union Theological School)로 명명하게 된 것이다.

1907년 가을부터는 37명의 신입생을 받아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이들 중 다수가 이미 신학반(회)에서 공부한 이들이었다. 이것이 협성신학교의 시작이었고, 감리교신학대학의 전신이 된다. 설립부터 1911년까지는 조원시가 교장이었다. 1915년에는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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