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창우 (2) 신실한 어머니, 유교집안에 신앙 심어
나는 1961년 인천 중구 신흥동 7번지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기도립병원 외과과장이셨다. 우리 집은 병원에 붙어 있는 방 2칸짜리 10평 미만의 다다미집이었다. 병원은 우리 5남매의 놀이터이자 삶의 울타리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 선생님들은 우리 남매를 많이 사랑해 주셨다.
어머니는 양반 가문의 종손 가정에서 태어나셨는데, 53년 군의관이던 두 살 위의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철저한 유교 집안에서 수많은 제사를 지내며 신앙생활을 못하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던 어머니를 기특하게 여기셨다.
“얘야, 시집살이를 하면서 집안일을 꼼꼼하게 잘하는 모습을 보니 참 갸륵하구나. 내가 널 위해 뭘 해줬으면 좋겠느냐?”
“저… 아버님, 죄송스럽지만 저는 교회에 꼭 나가야 합니다. 새벽예배를 가게 해 주십시오.”
“교회 가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느냐. 내일부터 당장 나가도 좋다.”
어머니는 하늘같은 시아버지의 허락에 따라 그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예배를 드렸고 철저하게 철야예배와 주일을 성수했다. 어머니는 믿지 않는 집안에 기도의 씨앗을 뿌렸다. 복음은 누룩 같이 퍼졌고 집안을 기독교 가문으로 변화시켰다.
대여섯 살 때의 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나를 깨워 교회로 향하셨다. 어린 나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어머니 등에 업혀 교회에 갔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한 시간 이상씩 기도를 하시며 큰아들부터 막내까지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가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리고 기도 말미엔 꼭 이런 간청을 하셨다. “주님, 세 아들 중 하나를 목회자로 만들어 주십시오.”
형은 키도 크고 덩치가 좋아 운동선수나 건축설계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목사나 의사를 시키려는 부모님과 자주 충돌했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우리 형제들은 밥상에서 식사하고 누나들은 저만치 떨어져 옹기종기 모여 양푼에 밥을 먹던 시절이었다. 동생과 나는 이불 속에서 이런 대화를 나눴다.
“어머니가 자녀 중에 목회자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기도드리고 계시잖니? 어차피 누나들은 시집 갈 사람들이니 해당되지 않고.”
“그럼 우리 남자 형제 세 명 중에서 하나가 되겠네.”
“그래, 근데 아무래도 형은 목사가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될 확률은 반반이다.”
“그럼 형하고 나하고 둘 중에서 하나가 목사가 되는 거야?”
“음, 그래야 될 것 같아. 근데 난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고 싶어. 어쩌지?”
“그럼 내가 해야 한다는 말이야? 내가 의사가 되고 형아가 목사가 되면 안 돼?”
어머니의 오랜 기도의 결과일까. 절대 의사나 목회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던 형은 오랜 방황을 마치고 파키스탄으로 건너가 16년째 선교사로 일하고 있다. 동생도 복강경 수술의 권위자로 삼성의료원에서 외과 전임의를 거쳐 한양대 의대 교수를 지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 풀러신학교에 진학해 지난달 목회학 석사를 취득했다.
올해 81세 되신 어머니 김용화 장로는 지금도 새벽예배를 하루도 빠지지 않으신다. 어머니는 귀한 음식을 만드시면 반드시 목사님께 먼저 갖다 드리라며 나와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우리 형제가 이렇게 큰 복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목회자 모시기를 하늘 같이 하고 평생 새벽제단을 쌓으신 어머니 덕분이다. 수술 집도 후 폭음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아버지를 주께 인도한 것도 신앙의 어머니였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
Ŭ! ̳?
Ϻ IJ о
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