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63) 유천리 고려청자의 美

Է:2011-04-1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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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63) 유천리 고려청자의 美

고려청자의 본고장으로 전남 강진을 떠올리는 이가 많겠지만 전북 부안도 쌍벽을 이룬 도요지였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고려시대 가마터는 전국 60여곳으로 이 가운데 가장 좋은 청자를 제작했던 지역이 강진과 부안이지요. 강진 가마터는 1914년 처음 발견된 후 28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의 노모리 겐이 정밀조사를 했으며, 부안 가마터는 29년 역시 노모리가 처음 발견했습니다.

33개의 부안 가마터 중에서 보안면 유천리 12호는 6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본격 조사를 실시했는데, 고려 19대 명종의 고분에서 나온 ‘청자 여지넝쿨 무늬 발’ 같은 상감청자 파편이 2만여점 출토돼 관심을 모았답니다. 또 강진에서만 생산된 것으로 알려진 간지(干支)가 있는 청자 중 ‘임오(壬午)’라는 글씨가 새겨진 것도 나와 제작시기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됐지요.

유천리 가마는 강진 등 중심 가마에서 파생돼 다소 늦게 개발됐지만 생산품의 양상과 수요층, 실질적인 운영주체와 방법, 고려 말 청자의 퇴락, 왜구의 침탈에 따른 폐요 시기(14세기) 등은 비슷하답니다. 지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었지만 고려왕실에 올려지는 최상급 청자는 물론이고 간지가 있는 청자까지 생산한 것으로 미루어 강진 가마의 분신과도 같았다고 하겠습니다.

파초에 앉은 두꺼비, 버드나무와 물새, 마치 붓으로 그린 듯 정교하게 상감된 소나무 등 독특한 문양을 지닌 유천리 청자는 고려시대의 감수성과 기교를 느끼게 하는 유물이랍니다. 벼루와 연적, 향로와 촛대, 술병과 그릇 등 용도도 다양하고 심지어 침이나 가래를 뱉는 용기인 타호(唾壺)까지 만들어 사용했다니 당시 청자가 얼마나 보편화됐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려 문인 이규보(1168∼1241)가 ‘푸른 자기 연적’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시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어느 한 청의동자(靑衣童子)/고운 살결 백옥 같구나/허리 굽실거리는 모습 공손하고/얼굴과 눈매도 청수(淸秀)하구나/종일토록 게으른 태도 없어/물병 들고 벼룻물 공급하네.” 이규보가 전주목에서 관직으로 있을 때 부안 청자를 보고 아름다움에 반해 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천리에서 출토된 넝쿨무늬접시 파편은 고려 중기 문신이었던 문공유(?∼1159)의 무덤에서 나온 ‘청자넝쿨무늬완’(국보 115호)과 비슷한 형태랍니다. 역상감기법으로 제작된 이 청자는 상감기법에 의한 것보다 더욱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내지요.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파편이어서 아쉽지만 당시 고려인이 지녔던 공예미에 대한 취향을 엿보게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각공예관에서 다음달 29일까지 ‘자연의 노래, 유천리 고려청자’ 전이 열립니다. 유천리 12호 가마터 출토품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리로 고려청자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답니다. 가마터에서 나온 파편들은 원형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지 못하지만 애정을 갖고 들여다보면 한 조각 한 조각에 깃든 의미를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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