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군대식 막사 자물쇠 채워 감금·노역 한번 갇히면 못나오는 ‘문어 방’ 같아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⑤ 공포의 노예 노동, 북해도탄광기선
홋카이도 출신 조선인 징용자를 취재하면서 그들에게 공통된 공포의 대상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바로 ‘다코베야(ダコ部屋)’다.
우리말로 하면 ‘문어 방’이다. 문어를 잡는 데 쓰는 항아리처럼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다는 의미다. 동시에 안에 갇힌 문어가 생존을 위해 스스로의 손발을 뜯어먹으며 버티듯, 한번 갇히면 자기 몸을 팔며 견뎌야 한다는 뜻도 있다. 일부 징용자들은 ‘사람 뼈가 없어질 정도로 두드려 패서 문어처럼 만든 뒤 일을 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
다코베야는 대기업 하청을 받은 청부기업(구미:組)들이 주로 애용한 노무관리 방식이다. 나무로 엉성하게 지은 군대식 막사 안에 식당과 변소를 몰아넣고 밖에 강아지 크기만한 자물쇠를 채워 감금한 채 강제 노역을 시키는 형태다. 도망자가 발생하면 일터로 갈 때나 숙소로 돌아올 때 노무자들을 굴비처럼 묶어 이동시켰다.
원래 메이지시대 홋카이도 개척 초창기 일본 정부가 죄수를 동원해 원시림을 개발할 때 이용한 방식이다. 일본 내부에서도 인권 유린 문제가 제기돼 1894년 금지됐으나, 태평양전쟁 총력동원 체제가 시작되면서 징용 조선인을 대상으로 홋카이도 토목공사장과 탄광에서 망령처럼 부활했다.
일본 육군의 하청을 받은 단노구미(丹野組)에 강제동원된 지옥동(83) 할아버지는 “다코베야에선 (감독이) 느덜 말 안 들으면 여기 쓸어 묻어도 누구 말할 사람 없다고 그랬다”고 전했다. 그는 1943년 6월 충남 천안에서 홋카이도 최북단 사르후츠촌 아사지노 비행장 공사장으로 동원됐다. 이가 들끓다 보니 금방 장티푸스에 걸렸다. 제대로 먹지 못하자 일주일 만에 의식을 잃었다. 단노구미 지정 병원으로 들어갔다가 시신 안치 장소로 옮겨졌다. 지 할아버지는 “맨바닥에다 뉘어 놓고 요만 덮어놓았어. 무서워서 일어나니 간호사들이 살아났다고 그러는 거야. 의사에게 가서 주사 3대 맞고 살았어”라고 회고했다.
박시영(90) 할아버지는 1943년 8월 경남 김해에서 홋카이도 히가시카와 유수지 공사를 담당한 지자키구미(地崎組)의 다코베야로 끌려갔다. 그는 “옷이 떨어져 시멘트 포대 실로 꿰매려 줍고 있으니께 아 뒤에 와서 몽둥이로 쎄리 버리는데 허리를 찧어버렸다”고 구술했다. 이때부터 그는 한평생 허리를 잘 쓰지 못하는 몸이 돼 버렸다.
다코베야 형태는 아니었지만 미쓰비시 오유바리(大夕張) 광업소 막장에 끌려온 강삼술 할아버지의 사사조(四四調) 가사 ‘북해도 고락가’에는 울분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어화생생 동무님들/ 이내가사 들어보소’로 시작하는 노래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조선땅의 우리집은/ 저녁밥을 먹건만은// 나는어찌 일을가나/ 삽을잡고 생각하니//(중략) 여기나의 이내몸은/ 수만길 땅속에서// 주야간을 모르고서/ 이와같이 고생인고// 남모르게 나는눈물/ 억수많이 울었다오.’
비바이(홋카이도) 특별기획팀=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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