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창시절 수상자로 내 이름이 교정에 울려 퍼진 건 중학교 2학년 때, 단 한 번뿐이었다. 그때 받은 상은 반공학생상이었다. 북한에서 날아온 ‘삐라’(전단)을 가장 많이 주워 제출한 학생에게 주는 상이었다. 산에 다니다 전단을 발견하면 나는 부지런히 모아 지서에 가져다 줬다. 그 덕분이었다. 운동장 조회 시간, 교장 선생님의 말씀까지 끝나자 작은 운동장이 술렁였다. 울려 퍼진 내 이름에 어린 동생들이 함께 축하해 주었다.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상장이 손에 들려 있었고 눈에는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그 얇은 종이 한 장이 아이였던 내게 처음으로 주어진 인정이었다.
지금은 달리기가 나의 정체성이 됐지만 어린 시절 나는 달리기와 인연이 없었다.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읍내 아이들보다 잘 뛸 법도 했는데 전력으로 달려도 꼴찌는 늘 내 몫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가을 운동회는 학생들만의 행사가 아닌 마을 전체의 축제였다. 장날에 맞춰 열리던 운동회날 가을걷이를 끝낸 어른들이 모두 학교 운동장으로 모여들었다. 학생들의 부모는 물론 이웃과 친척까지 자리를 잡고 아이들의 달리기를 응원했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100m 달리기였다. 여섯 명이 출전해 1·2·3등만 상을 받았다. 상은 연필 한 자루 공책 한 권의 소박한 것이었지만 어린 마음에는 그보다 더 값진 게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순위 안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결승선에 다다를 즈음이면 이미 시상대에 오를 아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키가 작고 순발력도 부족했던 나는 언제나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뒤를 달려야 했다.
운동회의 마지막 종목은 각 마을 대표가 뛰는 오래달리기였다. 우리 동네 대표는 언제나 친구 병재였다. 키도 크고 잘 달려 당연한 선택처럼 보였다. 속으로 한 번쯤 내 이름이 불리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늘 응원단이었다. 나는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부르고 북을 치며 친구들을 격려하는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뜻밖의 반전은 씨름판에서 찾아왔다. 4학년 때 학년별 씨름 대회에 준비도 없이 나섰는데 상대는 힘이 세기로 이름난 영복이었다. “개미허리에 살이 붙었네.” 구경꾼들이 수군거렸다. 시작하자마자 끌려가다 지겠구나 싶던 순간, 영복의 중심이 흔들렸다. 발바닥에 모래가 꾹 눌리는 감각과 함께 본능적으로 다리를 걸었다. 거구의 몸이 뒤로 벌렁 넘어졌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손에 잡히던 상대의 땀내와 모래 냄새, 삽시간에 뒤집히던 거구의 무게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고놈 참 대단하다!” 여기저기서 어른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승리가 내게 처음으로 진짜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작고 보잘것없는 내가 골리앗 같은 영복을 이겼다는 확신이었다. 아버지도 흐뭇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 한판으로 나는 동네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처음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드릴 날은 불행히도 많지 않았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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