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바이오산업의 기세가 거침없다. 인공지능 ‘딥시크’, 스마트폰 ‘샤오미’, 가전 ‘로보락’에 이어 ‘메이드 인 차이나’ 돌풍이 신약 무대까지 번졌다. 지난해 글로벌 빅파마가 외부에서 들여온 신약 파이프라인의 3분의 1을 중국 기업이 채웠다. 임상시험 건수 역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올해 들어서는 미국 빅파마와의 라이선스·공동개발 계약까지 폭증해 무역 갈등조차 비껴갔다.
K바이오는 중국의 거센 추격에 위기감이 한층 고조됐다. 국내 업계는 “상장 문턱을 과감히 낮춰야 투자 선순환이 살아난다”는 데 입을 모으고 있다. 중국 바이오텍과의 전략적 협업 채널 역시 서둘러 열어야 한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조용한 승자’ 中바이오… 임상 세계 1위
지난달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바이오 인터내셔널 컨벤션’(바이오 USA) 현장이 중국의 약진을 방증했다. 2년 연속 부스를 열지 않은 우시바이오로직스 탓에 “중국 존재감이 미미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실제론 바이오 안보 및 인공지능(AI) 세션마다 ‘차이나’가 끊이지 않았다. 우시바이오는 부스 없이도 실무진을 파견해 파트너링을 진행했다. 진퀀텀헬스케어·히트젠 등 23개 기업 및 기관이 공동으로 꾸린 ‘중국관’엔 참관객이 몰렸다.
8일 글로벌 리서치 업체 딜포마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빅파마가 외부에서 들여온 신약 파이프라인의 31%가 중국 기업에서 나왔다. 2020년 10%, 2022년 12%에 그쳤던 중국 비중이 불과 2년 만에 세 배 가까이 치솟았다.
임상시험 규모도 중국이 장악했다. 시장조사기관 글로벌데이터에 따르면 중국은 2021년부터 미국을 제치고 임상시험 건수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비교적 저렴한 임상 비용과 인간 대상 데이터(POC)를 빠르고 대규모로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덕분이라는 평이다.
10년 만에 르네상스 시기를 맞이한 중국 바이오의 폭발적인 성장 뒤엔 정부의 ‘정책 드라이브’가 있다. 중국 정부는 2011년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제약바이오 산업을 국가 핵심 산업군으로 지정한 뒤 다양한 인센티브 정책을 추진해왔다. 2015년 ‘메이드 인 차이나 2025’ 정책서는 바이오 의약을 10대 전략 산업으로 못 박아 제조 인프라뿐 아니라 연구·임상 역량까지 집중 육성 중이다. 이에 미국식품의약국(FDA) 출신 연구자를 포함한 중국계 과학자들이 대거 귀국해 창업하거나 R&D를 이끌면서 ‘리쇼어링’(reshoring) 인재가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활발해진 미·중 협력, 이유는
특이점은 미중 갈등 심화에도 양국의 바이오 라이선싱 속도가 오히려 빨라졌다는 사실이다. 올해 상반기 미국 빅파마가 중국 바이오기업과 맺은 라이선스·공동개발 계약은 14건, 잠재 가치는 183억 달러(약 24조8700억원)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단 2건에 불과했던 라이선싱 계약 건수 대비 7배 증가한 수치다.
굵직한 딜도 줄을 이었다. 중국 3S바이오는 지난 5월 화이자에 차세대 항암제 후보인 PD-1×VEGF 이중항체의 중화권 제외 지역 권리를 60억5000만 달러 규모로 기술이전했다. 리제네론은 중국 한소제약과 전략적 라이선스 계약을 맺어, 임상 3상 단계인 GLP-1/GIP 이중 작용 비만 치료제의 중화권 제외 독점 개발 및 상업화 권리를 확보했다. 아스트라제네카 역시 중국 CSPC와 AI 기반 신약 연구 협력에 53억 달러를 투자했다.
이 기업들이 중국과 잇따라 계약을 체결한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총국(NMPA)은 최근 신약 임상시험 검토 대기기간을 기존 60일에서 30일 이내로 단축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중국은 임상시험 심사에서 FDA와 마찬가지로 의뢰자가 정해진 기간 내에 규제 당국의 이의 제기를 받지 않으면 자동으로 임상이 승인되는 방식을 운영하고 있다.
향후 5년 안에 블록버스터 의약품 약 2000억 달러어치가 특허 만료를 앞두게 되면서, 대규모 미국 제약사들이 파이프라인 공백을 메울 저비용·고혁신 대안으로 중국 바이오텍을 택한 점도 주효했다. 실제로 한국바이오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발 라이선싱의 71%가 전임상·임상 1상 단계, 선불금의 77%가 초기 계약에서 나왔다.
‘성장계층’ 열린 중국, 한국은 규제 풀어야
파죽지세 속 중국은 기술 스타트업의 자본 조달문을 과감히 열었다.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CSRC)는 지난달 상하이 증권거래소 스타마켓에 수익성이 없는 기술 스타트업을 위한 ‘성장 계층’(Growth Tier)을 신설했다. 적자 기업이라도 기술력만 입증하면 상장을 허용하는 제도다. 성장계층 종목에는 위험도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U’(Unprofitable) 표식을 붙이고, 개인투자자는 투자 적합성 심사와 고위험 공시서 서명을 거쳐야만 매매할 수 있다.
이 트랙의 첫 번째 수혜자는 식물-유래 재조합 단백질 플랫폼을 보유한 우한허위안바이오테크놀로지다. 지난 1일 중국 증권거래소의 상장 심사를 통과했다. 이 기업은 이번 상장으로 35억 위안(약 6626억원)을 조달할 계획이다. 수익성은 부족하지만 혁신성을 인정받아 단숨에 자금을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대조적으로 한국의 코스닥 기술특례상장은 2005년 도입 뒤 문턱이 갈수록 높아졌다. 이미 시장에 입성한 바이오 선배들마저 잇달아 상장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이중 항체 치료제 개발사 파멥신은 두 차례 연속 법인세차감전계속사업손실(법차손) 50%를 넘겨 지난달 상장 폐지됐다. 파킨슨·췌장암 치료제 개발로 주목받던 셀리버리도 지난 3월 시장에서 퇴출됐다. 우한허위안과 유사한 식물백신 기술을 가진 바이오앱은 기술성 평가와 스팩 합병이 모두 무산돼 자금난에 처해 있다.
시행한 지 약 20년이 지난 기술성특례상장 제도를 다시 손봐야 한단 제언이 나온다. 본래 취지를 실현할 수 있도록 맞춤형 투자자 보호 및 기업 관리 방안이 마련해 시장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지난해 보이지 않던 중국 기업들의 활동이 올해는 두드러졌다. K바이오가 3~5년 안에 의미 있는 도약을 이루지 못하면 글로벌 경쟁에서 밀릴 것”이라며 규제·제도 개편의 골든타임이 임박했음을 경고했다.
이다연 기자 id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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