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돌입한 ‘홈플러스 사태’에서 최대주주인 MBK파트너스의 부실한 경영과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김병주 MBK 회장은 책임 회피에 급급한 모습이다. 과거 유사한 위기 국면에서 재계 총수들이 사과를 표명하거나 사재를 출연하는 등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던 것과 대조적이다.
12일 국회 등에 따르면 MBK에 대해 국회와 정부 당국의 전방위적인 압박이 이뤄지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오는 18일 열리는 홈플러스 사태 긴급 현안 질의에 김 회장과 김광일 MBK 부회장 겸 홈플러스 공동 대표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도 MBK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홈플러스 사태의 원인에 대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들끓자 김 회장을 비롯한 핵심 경영진을 겨냥한 것이다. 김 회장은 MBK의 투자심의위원회 의장으로서 유일하게 ‘비토권(거부권)’을 보유하는 등 MBK에서 무소불위한 권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에 따르면 홈플러스는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직전인 지난달 25일까지 기업어음(CP)과 전자단기사채를 발행해 증권사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판매했다. 홈플러스가 보유한 CP 및 전단채 규모는 지난 4일 기준 1880억원에 달하는데 사실상 ‘휴짓조각’으로 전락하면서 개인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봤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수조원을 단기 대여해준 메리츠증권도 황당해하고 있다”면서 “(MBK가) 대형 증권사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개인 투자자들 피해는 고려 대상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MBK는 회생 절차 신청의 직접적 계기가 된 신용등급 하락을 예견했음에도 CP·전단채 발행을 강행했다는 비판에 직면해있다. MBK는 신용등급 강등을 예상하지 못했고 기업회생을 신청하기로 결정한 시점은 신용등급 하향 조정 이후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업계에선 이미 홈플러스의 부채비율이 과도한 데다 지난해 11월 납품 대금 상환 사태가 발생한 상황에서 MBK가 신용평가 하락을 짐작하지 못했다는 해명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통상 신용등급 강등 여부는 신용평가사와의 스킨십을 통해 미리 알 수 있다”며 “이미 재무 안전성이 떨어진 상황에서 등급 하락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설명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과거 홈플러스 사태와 유사한 CP 발행 사태로 위기를 맞았던 LIG그룹, 동양그룹 총수는 직접 사과하고 피해 보상을 위해 사재를 출연했다. 2011년 고 구자원 LIG그룹 명예회장과 장남인 구본상 현 LIG그룹 회장, 차남 구본엽 전 LIG건설 부사장 등 삼부자는 LIG건설의 회생 절차 신청 열흘 전까지 2151억원 상당의 CP를 발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에 구 명예회장은 2012년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사재 730억원을 출연해 보상책을 마련했다. 이후 LIG손해보험 지분도 매각해 추가로 1300억원 규모의 보상을 실시했다.
2013년 동양그룹도 부도 위험성을 숨긴 채 동양증권을 통해 1조3000억원대 CP와 회사채를 발행해 투자자 4만여명에 피해를 끼쳤다. 현재현 당시 동양그룹 회장은 국회에 출석해 공식 사과했다. 현 회장은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머리를 숙였고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7년간 복역했다.
이차전지 기업 금양은 지난해 10월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되자 사과문과 혁신안을 발표했다. 류광지 금양 회장이 4150억원 상당의 보유주식 1000만주를 회사에 무상 증여키로 했다. 책임 경영을 실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태영건설 워크아웃(기업구조 개선작업)으로 위기를 겪던 태영그룹도 지난해 초 윤세영 창업 회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단상에 올라 직접 사과했다. 당시 윤 회장은 “워크아웃 신청으로 채권단과 정부,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 비자금 사태’가 불거지자 2008년 4월 ‘대국민 사과문’에서 경영 일선 퇴진을 선언했다. 이어 그룹 경영쇄신 방안의 하나로 “차명 재산 중에서 누락된 세금 등을 납부하고 남은 것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후 2021년 삼성 일가는 감염병 예방과 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 지원을 위해 1조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잇따른 노동자 사망 사고로 논란이 됐던 SPC그룹의 허영인 회장과 이해욱 DL그룹 회장도 국회 산업재해 청문회에 나와 고개 숙여 사과했다.
반면 미국 국적의 김 회장은 현재 미국에 체류하며 이같은 요구에 ‘묵묵부답’이다. 미국 국적자는 한국 법률의 직접적인 관할권 밖에 있으며 해외에 체류하는 경우 강제 소환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국회 상임위원회와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실제 출석한 적은 없다. 지난해 10월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해외 출장을 이유로 불출석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이번 사태를 수습하고 추락한 사모펀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김 회장이 사재를 내놓거나 MBK가 자기 자본을 투입하는 등 자구책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번 사태가 원활하게 수습되지 못할 경우 자본시장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모펀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굳어질 수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러한 행태를 방치하면 사모펀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시장 혼란을 초래하는 만큼 금융당국과 검찰이 강도 높고 신속한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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