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경주 (2) 공부보단 운동에 소질… 등록금 부담에 학교 역도부 가입

Է:2024-12-0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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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농사·바닷일 도우며 자라
부지런하고 알뜰한 삶 몸에 익혀
중학교 입학, 본격 역도훈련 시작
입상 욕심 컸으나 실력 늘지 않아

전남 완도 고금도와 신지도를 잇는 장보고대교. 최경주 장로는 전남 완도군 완도읍 화홍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연합뉴스

골프의 기역(ㄱ)도 모르던 내가 프로 골퍼가 된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1970년 5월 19일 전남 완도군 완도읍 화홍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향인 완도는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을 자랑하는 곳이다. 3남 1녀 중 장남인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 농사일을 도왔다. 부모님은 농사일과 고기잡이 일을 하셨기에 1년 중 쉬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두 분은 “모름지기 부지런해야 사람 노릇을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어릴 적 학교를 다녀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던지기가 무섭게 밭에서 아버지가 “경주야, 물 보러 가거라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고무 대야를 들고 개펄로 향했다. 하교 후 친구들이 마을 공터에서 공을 차자고 붙잡았지만, 나에겐 아버지의 쟁쟁한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를 도와 화홍포 뻘밭에 2m 간격으로 나무 꺾쇠를 박아 덤장그물을 치는 게 내 일이었다. 개펄에 물이 빠질 때가 되면 나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을 털어 담아왔다. 물때가 오기 전 서둘러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고무 대야에 달린 끈을 허리에 동여맨 채 덤장에서 바닷가까지 1㎞ 정도 되는 거리를 빠르게 빠져 나와야 했다. 그렇게 집에 오면 아버지는 또다시 밭에 거둬 놓은 작물을 가져오라고 시키셨다.

집에서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들이었지만 친구들과 놀 때는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오봉산 상황봉 자락에서 친구들이 놀자고 부르면 후딱 집안일을 돕고 뛰어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는 걸 좋아했던 나는 공부보다 운동에 소질을 보였던 것 같다. 사람들은 내가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한 촌놈인 줄 안다. 집안이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다. 미역 양식부터 쌀 녹두 콩 농사를 지었고, 장어 낙지 소라 김 미역 등 다양한 해산물을 먹으며 자랐다. 생활비는 뻘밭에서 잡은 고기를 팔아서 충당했다.

초가집 단칸방에서 생활했던 여섯 식구는 전깃불을 아끼느라 저녁 식사가 마치기 무섭게 소등했다. 카메라가 없어 그 당시를 남긴 가족사진 한 장 없지만 불평불만 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았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운동의 세계에 들어가게 됐다. 중학교에 입학하면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소리에 어린 나는 불안해졌다. 아버지에게 현금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동네 형이 쏠쏠한 정보를 알려줬다. 역도부에 들어가면 등록금을 안 내도 된다는 것이었다. 육성회비 8900원만 내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니.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미리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역도를 본격적으로 하다 보니 큰 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따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만큼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역기를 한 번에 머리 위까지 들어올려야 하는 인상 종목은 하체가 짧고 팔이 긴 내 체형엔 맞지 않았다. “까짓것 하면 되지, 한 번 끝까지 해보자”며 자신을 다독였지만 운동은 의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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