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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욱 칼럼] 탄핵이란 블랙홀이 집어삼킨 정치


충분한 사유가 있는데도
트럼프 탄핵에 실패한 미국

극단으로 갈라진 정치세력이
정쟁 이벤트로 활용하는 남미

한국은 한때 무용론 반박하는
모범적 사례였지만
지금은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

탄핵은 오래된 제도다. 1376년 영국 의회는 왕의 대리인이던 윌리엄 라티머 남작이 권력을 이용해 뇌물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라티머는 모든 직위에서 해임된 뒤 투옥됐다. 역사상 첫 탄핵이었다. 공화정이 등장하고 왕이 처형됐던 최악의 정치 혼란기, 의회는 왕과의 권력투쟁에 탄핵을 앞세웠다. 찰스 1세 때 버킹엄 공작과 스트래퍼드 백작, 찰스 2세 때 클라렌던 백작과 댄비 백작이 줄줄이 탄핵이라는 심판대에 올랐다. 하지만 의회가 내각 구성을 책임지면서 탄핵은 잊혀진 전통이 됐다.

영국에서 시들해진 제도를 대통령제 정부의 주요 정치행위로 되살린 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다. 이들의 관심은 권력분립이었다. 대통령, 의회, 사법부 어느 한 곳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각 부문에 다른 부문의 침해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도구를 제공했다. 하원이 소추하고 상원이 심판하는 탄핵은 행정부와 사법부를 견제하는 입법부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법을 어긴 공직자를 해임하고 공직 자격을 박탈하는 것만으로도 왕이 되고자 하는 대통령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미국에서는 1868년 앤드류 존슨, 1998년 빌 클린턴, 2019·2021년 도널드 트럼프 및 1974년 리처드 닉슨 등 5번의 대통령 탄핵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하원 표결 직전 면책 특권을 조건으로 스스로 사퇴한 닉슨을 포함해 상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된 경우는 없었다. 트럼프의 두 번째 탄핵 사유는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고 국회의사당을 공격한 폭도를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의회는 끝내 대통령을 견제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화당이 상원의 다수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속한 정당이 배출한 대통령의 몰락은 의원들에게도 커다란 정치적 손실이었다.

탄핵의 본래 목적은 권력자의 위법한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형식과 절차가 엄격하게 정해진 형사적 소추가 아닌 정파적 이익을 전제한 정치행위이기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악용하기 시작하면 본래의 목적은 쉽게 실종된다. 대통령 탄핵이 정치 이벤트처럼 진행되는 남미가 그렇다. 브라질에서는 1992년과 2016년, 파라과이에서는 2012년, 페루에서도 2020년 11월 탄핵으로 대통령이 물러났다. 2017년과 2020년 9월의 페루, 2019년 칠레, 2021년 파라과이는 탄핵에 실패한 경우다. 처음에는 권력형 부정부패에 분노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탄핵으로 귀결됐지만 지금은 극단적으로 갈라진 정치세력의 줄다리기에 탄핵이라는 제도가 동원되고 있다. 대선에서 패한 정당은 탄핵을 시도한다. 대통령이 의회를 장악했으면 실패로 끝나고, 반대의 경우라면 성공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의 경고대로다. “무죄나 유죄의 실체적 증명보다는 정당의 상대적 힘에 좌우될 위험이 있다.”

2021년 트럼프 탄핵이 무산됐을 때 미국 정치학계에는 남미 사례를 근거로 탄핵제 무용론이 제기됐다. 그런데 무용론을 반박할 때 한국 사례가 등장하곤 했다. 대통령권 남용을 입법부가 막았고 최종 판단은 사법부의 법리 해석에 따랐으며, 탄핵 이후 신속한 선거로 혼란을 최소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상황을 놓고는 그런 말을 하기 어렵다. 우리 정치는 남미식 탄핵의 길로 가고 있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대통령 탄핵이 거론됐고, 모든 정치적 이슈는 이 블랙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22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특검법과 국정조사 요구를 쏟아내는 야당의 최종 목적지는 분명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어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청원 청문회 실시계획서를 채택했다. 2020년 3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 탄핵 촉구 청원에 140만명 넘게 동의했으니 국민청원을 탄핵의 근거로 삼기 어려운데도 멈추지 않는다. 역풍을 기대하며 반전을 노리는 대통령실과 국민의힘도 다를 게 없다. 늘 탄핵을 염두에 두고 움직인다.

그러니 지금까지 쌓아온 국회의 관행이나 상식적·합리적 의사결정이 살아남을 수 없다. 야당은 근거가 박약한 검사 탄핵까지 주저하지 않고, 여당은 당대표 선발 기준으로 ‘배신 가능성’을 들이댄다. 여야 모두 탄핵 앞에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태세다. 탄핵에 잡아먹힌 정치, 꼬리가 몸통을 흔들고 있다.

고승욱 수석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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