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외과 의사 A씨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동남아시아 국가의 병원을 여러 차례 방문해 ‘원정 수술’을 했다. 한국식 성형 수술의 인기가 높아 수십억원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A씨는 세금 추적을 피하기 위해 현지 병원과 짜고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와 차명계좌를 동원했다. 병원 측이 암호화폐를 사서 외국인 브로커 B씨에게 보내면, B씨는 이를 국내 가상자산거래소에서 원화로 바꾼 뒤 현금자동인출기(ATM)를 이용해 A씨 계좌에 입금했다. A씨는 이런 수법으로 막대한 소득세를 탈루했다.
국세청은 이 같은 암호화폐 은닉, 국적 변경과 같은 지능적 수법으로 소득을 해외로 숨기거나 빼돌린 역외탈세 혐의자 41명에 대해 세무조사에 착수했다고 2일 밝혔다.
조사 대상엔 A씨처럼 해외 원정 진료를 한 의사들과 현지 법인을 세운 뒤 수출대금을 자녀 해외 체류비 등으로 유용한 혐의자가 13명으로 가장 많다. 국적을 바꾸거나 법인 명의를 위장한 ‘신분세탁’ 탈세자가 11명, 용역대가를 암호화폐로 받아 소득을 감춘 코인개발업체 탈세자가 9명, 국내 알짜 자산을 해외로 무상 이전해 법인세를 과소 신고한 다국적 기업 관계자가 8명이다.
이들은 국내외 거래 과정 및 재원 추적이 어려운 암호화폐와 외국 국적의 특성을 악용했다. 사업가 C씨는 현지 투자를 하는 대신 시민권을 받는 ‘황금 비자’를 활용해 조세회피처에 국적을 취득했다. 해외 자산·계좌가 외국인 명의로 바뀔 경우 국세청이 파악하기 어려운 점을 노렸다. 국적을 세탁하고 ‘검은머리 외국인’으로 국내에 들어와 호화생활을 누리던 C씨는 자금 흐름을 수상하게 여긴 국세청 조사 대상에 올랐다.
국내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D사는 해외 매출 대금을 코인으로 받았다. 이렇게 받은 코인을 해외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매각해 법인 수익을 감췄다. 제조업체 E사는 해외 거래 대금을 신고하지 않고 사주의 원정 도박과 사주 자녀의 해외체류비로 유용하다 적발됐다. 다국적 기업의 국내 법인 F사는 핵심자산인 기술·특허부터 고객 정보, 영업 노하우 등을 모두 해외로 옮겼다. 국내 법인엔 집단 해고를 실시해 ‘껍데기’만 남기는 수법으로 법인세를 과소 신고했다.
국세청은 매년 역외탈세 혐의자에 대해 전국 동시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정재수 국세청 조사국장은 “세법 전문가의 조력과 가상자산 등을 활용한 역외탈세 수법이 갈수록 지능화, 고도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세종=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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