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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가치 극대화라 쓰고 먹튀라 읽는다

[사모펀드 대해부] ③ 언-밸류업 사모펀드 민낯

입력 : 2024-06-20 00:19/수정 : 2024-06-20 00:19
게티이미지뱅크

토종 사모펀드가 기업 경영권 분쟁에 뛰어들면서 시장 생태계 교란을 일으키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들 사모펀드의 공통점은 겉으로는 ‘주주가치 제고’와 ‘기업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소액주주 편에 서겠다”는 것도 이들 펀드의 단골 구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보면 ‘먹튀’ 오명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이동기 한국이해관계자경영학회장(서울대 경영대 명예교수)은 19일 “국내 사모펀드의 영향력이 매우 커진 상황에서 단기적인 수익 추구에만 집착하는 행태가 문제”라면서 “장기적 관점이 요구되는 산업에서 (사모펀드의 개입으로)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재계 안팎에서는 한미약품그룹의 지주회사인 한미사이언스 오너 일가 간 경영권 분쟁이 대표적인 사모펀드 개입으로 인한 시장 왜곡 사례로 꼽힌다. 한미약품 창업주인 고(故) 임성기 선대회장이 지난 2020년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오너 일가는 5407억원의 상속세를 부과받았다. 이 상속세를 납부하는 과정에서 오너 일가 분쟁이 시작됐다. 상속세 재원 마련이 급했던 송영숙(임 선대회장의 배우자)·임주현(임 선대회장의 딸) 모녀는 토종 사모펀드인 라데팡스파트너스(라데팡스)와 손을 잡았다. 이들은 라데팡스에 한미사미언스 지분을 넘기고자 했다. 라데팡스는 KCGI에서 최고전략책임자로 일하던 김남규 대표가 2021년 세운 신생 사모펀드 회사다.

라데팡스는 한미사이언스 지분 11.8%가량을 약 3200억원에 인수하려 했다. 그러나 라데팡스가 지분 매수에 활용하려던 펀드의 앵커 LP(최대 출자자)였던 새마을금고가 유동성 위기로 투자를 철회하면서 자금 조달에 실패했다. 라데팡스는 IMM인베스트먼트와 KB인베스트먼트 등과 손잡고 지분을 공동 인수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됐다. 결국 지난 1월 라데팡스는 직접 인수를 포기했다. 이후 라데팡스는 OCI홀딩스를 ‘백기사’로 끌어들였다. 한미약품과 OCI홀딩스의 통합을 자문하고 수수료를 챙기는 쪽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주주총회를 앞두고 라데팡스 측은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과 소액주주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모녀 측이 주주총회 표대결에서 지면서 그룹 통합 작업도 무산됐다. 한미약품 경영권은 장남 임종윤, 차남 임종훈 형제에게 돌아갔다. 한미사이언스 이사진은 임종윤 사장 측이 장악했다. 라데팡스가 한미약품 오너 일가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계획한 전략은 실패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싸움의 승자는 라데팡스라는 평가가 나온다. 경영권 분쟁이 이어지는 동안 자문 수수료를 챙기면서 라데팡스는 오히려 이득을 봤다는 게 업계의 이야기다. 반면 경영 불확실성이 커진 한미사이언스 주가는 하락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액주주들이 떠안았다. 한미사이언스 주가는 지난 1월 16일 5만6200원으로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라데팡스가 개입해 경영권 분쟁이 시작된 이후 내내 하락세를 나타냈다. 이날 한미약품 종가는 3만1650원으로 1월 고점 대비 40%가량 하락했다.

2021년 새로 세워진 신생 토종 사모펀드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얼라인)도 단기 이익만을 노린 ‘먹튀’로 의심받는다. 지난달 얼라인의 모회사인 얼라인홀딩스는 보유하고 있던 SM엔터테인먼트(에스엠) 주식 1만주를 3월에 전량 매도했다고 공시했다. 얼라인은 3월 보유 지분 26만8500주를 증권사에 한 달간 빌려주는 대차거래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2022년부터 에스엠을 상대로 주주가치 제고를 외치며 ‘장기투자’를 강조한 것과 정반대 행보다. 얼라인 측은 “에스엠 이사 취임 이후 여러 행정적 번거로움이 초래될 것을 예상해 취임 전 보유 주식을 정리하고자 했다”고 해명했다. 얼라인 측이 대차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만 9억6000만원 정도로 추산된다.

KCGI와 DB하이텍 분쟁도 사모펀드의 섣부른 개입으로 혼란을 야기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KCGI는 지난해 3월 주주가치 제고 등을 요구하며 투자목적회사인 캐로피홀딩스를 통해 DB하이텍 지분 7.05%(312만8300주)를 매입했다. KCGI는 6월부터는 공개 주주서한을 발송하며 공세에 나섰다. 회계장부와 이사회 의사록의 열람 및 등사를 요구하는 소송도 연이어 제기했고, DB하이텍에 김준기 창업회장의 퇴사와 김남호 DB그룹 회장의 등기이사 진출 등도 요구했다. DB하이텍은 KCGI의 요구 중 김준기 창업회장의 퇴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대립각을 세웠다.

KCGI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회사를 둘러싼 혼란이 커졌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갑자기 양측 협의가 이뤄졌다. DB하이텍 최대주주이자 DB그룹 지주사격인 DB아이엔씨(DB Inc)가 KCGI에서 보유 중인 DB하이텍 지분 7.05% 중 5.26%를 1650억원에 매입한 것이다. 주당 6만6000원이었다. KCGI의 DB하이텍 지분 매입 평균가는 5만원대다. KCGI가 경영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벌인 약 9개월 만에 10%대 수익을 올린 셈이다. 이후 KCGI는 DB하이텍을 향해 제기했던 소송도 모두 취하했다. KCGI가 애초에 단기 차익을 위해 분쟁을 키웠던 것 아니냐는 의심에 무게가 실리는 대목이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KCGI의 말을 믿고 투자한 개인들만 손해 본 상황”이라며 “사모펀드의 개입이 반드시 선량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부정적인 사례가 됐다”고 말했다.

백재연 윤준식 기자 energ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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