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후손들의 수난, 그래도 흐르는 순교영성 DNA

나의 아버지 주기철/유승준 지음/홍성사
밀알의 흔적/박중기 지음/크리스챤서적

주기철(왼쪽) 목사가 1932년 백일을 맞은 막내아들 주광조 장로를 안고 있다. 주 목사 옆은 주 장로를 비롯한 4형제의 생모 안갑수 여사. 홍성사 제공

“하나님이 다 뭐야! 나는 절대로 목사가 되지 않을 거야!”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주기철(1897~1944) 목사의 4남 주광조(1932~2011) 장로가 1944년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한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친 뒤 울부짖으며 한 말이다. 4년 전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주 목사가 수감된 이후부터 가족들은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일제의 압박으로 아버지가 시무했던 산정현교회 사택에서 쫓겨난 이들은 해방 전까지 거처를 13차례나 옮겼다. 일경의 감시 탓에 집을 오래 빌려주는 이들이 드물어서다. 학교에 다니던 형들은 모두 퇴학을 당했고 감시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졌다. 할머니와 자신을 건사하며 옥바라지를 해온 어머니마저 경찰서에 끌려가자 12살 소년이던 주 장로의 좌절과 울분이 극에 달한 것이다.

순교자의 삶을 기념하자는 목소리는 높지만 그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모진 풍파를 기억하는 이들은 드물다. ‘일사각오’ 주기철 목사와 좌익 인사의 압박에도 끝까지 교회를 지키다 6·25전쟁 때 순교한 박병근(1892~1950) 전도사의 유족 역시 가장을 잃고 힘겨운 시절을 견뎌야 했다.


주 목사의 순교 80주년을 맞아 개정판으로 나온 ‘나의 아버지 주기철’(홍성사)에는 순교자 가족이 겪은 애환이 잘 드러난다. 책에는 주 장로의 시선으로 본 아버지의 순교 막전 막후와 남겨진 이들의 인생 역정이 기록됐다. 아버지가 교회와 사회에서 신사참배에 맞섰다면 아들들은 일왕을 향해 허리 숙여 절하는 ‘동방요배’를 거부하다 학교와 학원에서 쫓겨난다. 아버지 수감 기간 내내 생활고에 시달려 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날이 부지기수였으며 금식기도를 자주 해 이마저도 먹을 수 없는 날이 적잖았다. 어머니, 할머니와 같이 면회를 갔다 부모가 잔혹하게 고문당하는 걸 목격하고 한동안 실어증을 앓기도 했다.

아버지 순교 이후로도 고난은 이어졌다. 해방 후 숭인중학교에서 수학하던 주 장로는 이번엔 1947년 반탁운동과 반공시위에 참여했다가 다시 퇴학당한다. 같은 해 어머니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평양 장현교회 전도사인 큰 형마저 전쟁 직전 공산당에게 희생되자 “하나님은 너무도 가혹한 분”이라며 통곡한다.

한동안 방황했던 그를 붙잡은 건 어머니가 유산처럼 남긴 시편 37편 25~26절이었다. 주 목사 유족을 포섭하고자 김일성이 현금과 적산가옥 및 땅문서가 든 보자기를 보냈을 때 이를 거절한 어머니가 실망한 그에게 준 성경 구절이다. 교회와 거리를 두며 살았던 그는 40대에 영락교회에서 이 말씀을 접하고 가족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린다. 이후 평생을 한국교회와 사회에 아버지의 순교 신앙과 정신을 전하는 데 진력했다.


박병근 전도사의 가계에 흐르는 기독교 신앙을 기록한 ‘밀알의 흔적’(크리스챤서적)에도 순교자 후손이 겪은 비극이 담겼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강진과 영암경찰서에서 1년 넘게 옥고를 치른 박 전도사는 출소 후 자택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등 일경의 감시에도 꿋꿋이 목회를 이어간다. 해방 후엔 함평 나산교회 등 좌익 세력이 강한 지역의 교회에 부임해 성도와 교회를 지키다가 전쟁 중 공산군에게 끌려가 순교했다. 이를 들은 2남 박금규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려 함평에 왔다가 ‘미션스쿨(숭일중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공산당원에게 살해당한다. 사위 김인봉 전도사도 전쟁 중 공산당원에게 붙잡혀 희생됐다.

박병근 전도사가 6·25전쟁 중 순교 당시 입고 있던 옷의 일부. 총탄이 뚫고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크리스챤서적 제공
박병근 전도사의 초상. 크리스챤서적 제공

잇따른 비보 가운데서도 유족은 박 전도사 순교 당시 입은 옷에서 총탄이 뚫고 지나간 부분을 잘라 보관했다. 그의 ‘일사각오 신앙’을 후손에게 남기기 위해서였다. 이 영향으로 박 전도사의 장남 박환규 목사를 시작으로 대를 이어 목회자를 배출하는 가문이 됐다. 책을 펴낸 박 전도사의 손자 박중기 장로는 “우리 집 가훈은 ‘죽도록 충성하라’다. 아버지께선 명절 때마다 총구멍이 난 할아버지의 옷 조각을 보여주곤 하셨다”며 “이 책이 한 가족의 자랑이 아닌, 선조의 신앙을 본받는 이들의 기록으로 남겨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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