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를 오랫동안 사랑해 왔다. 아침에 늦지 않게 태워다 주고, 전화하면 어디서든 데리러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면 전국 어디서든 택시 잡아타고 집으로 와. 내가 택시비 줄게”라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내가 서울에 오고 나선 가끔 서울이라며 연락해서 지갑과 주머니며 다 털어 천원짜리까지 내 손에 쥐어 주곤 했다. 기회가 많진 않았지만 직접 무언가를 사줄 때면 ‘기왕이면 좋은 것’을 찾았다. 신뢰할 만한 여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여전히 내 이야기만 나와도 입이 귀에 걸린다.
그렇다고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말에 대한 내 의견이 동의나 지지가 아니면 “네가 뭘 아냐!”라며 언성을 높였다. 대기업이던 첫 직장 외에 내가 다닌 회사들은 그의 눈에 다 마땅치 않았고 내 월급은 너무 적었다. 나는 그와 논쟁을 벌이는 대신 차갑게 굴었다. 전화가 와도 내킬 때만 받았다. 그가 나를 아끼고 나의 행복을 바란다는 걸 알지만 그의 생각과 표현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따로 지내기 시작하면서 애틋함이나 걱정은 더욱 그의 몫이 됐다. 나의 일상에는 그가 들어올 틈이 없었다. “언제 한 번 안 오니”라고 연락이 몇 번 와야 선심 쓰듯 짧게 시간을 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단편적이다. 그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시간도 취미도 없었다. 책을 읽지도 않고, 음악을 듣지도 않았다.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일도 없었다. 그는 365일 동안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고 밤늦게 닫는 자영업자였다. 그의 머릿속은 항상 복잡했다. 자신의 어깨에 매달린 여러 식구들 때문에 무리해서 일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와 동생들과 자식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내가 신뢰하는 여자와 결혼한 것, 그게 그의 유일한 행운 같았다.
지난해 노벨상 수상 작가인 아니 에르노의 책 ‘남자의 자리’를 최근에 읽었다. 작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쓴 회고록이다. 전쟁과 가난 등의 상황이 삶의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우리 아버지 세대와도 얼마간 겹쳐졌다. 그 앞서 말한 우리 아빠 말이다.
‘나는 나 혼자만을 위해 살기 시작했다. 그 자신은 모르는 사치를 내가 누리기만을 바라며 나를 키웠던 아버지는 흐뭇해했지만, 던롭필 가구나 옛날 서랍장 같은 것은 그에게 내 성공을 확증해 주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었다. 이 모든 걸 요약하듯 그는 말하곤 했다. “그럼! 너희들은 당연히 누려야지!”’
‘나는 한 번도 오래 머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남편에게 가져다주라며 코냑 한 병을 주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고!”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는 걸 자존심으로 여기는 그였다. “감정 같은 것은 호주머니에 넣고 그 위에 손수건으로 덮어 놓는 거야.”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아빠 생각이 났다. 함께 보낸 시간도 나눈 대화도 많지 않은데 아빠가 죽고 나면 나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야 할까. 회고록에 쓸 말이나 있을까. 나는 내내 엄마와 연결돼 있었다. 아빠에 대한 불만은 주로 내가 사랑하는 여자, 오래전에 아빠가 발견하고 결혼하자고 졸랐던 여자를 존중하지 않는 데서 왔다. 아빠 혼자 결정해버린 일들의 결과가 엄마의 삶을 흔드는 것이 싫었다. 아빠는 엄마에겐 특히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을 할 줄 몰랐다. 너무 긴 이야기라 그랬을까.
하나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준 남자라는 것. “너 잘되는 것 말고 내가 뭘 바라겠니”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하면 나 역시 아빠에게 미안하거나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고작 퉁명스러운 전화 한 통에도 기뻐할 사람인 걸 알면서도 인색했다. 그를 좋아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그의 사랑은 나에게 충분했다. 고맙습니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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