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경찰과 국방부가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문재인정부 당시 내려졌던 결론을 번복한 가장 큰 이유는 근거 부족 때문이다. 이들 기관은 “월북 의도를 인정할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해경), “실종 공무원의 자진 월북을 입증할 수 없었다”(국방부)는 입장을 16일 발표하면서 자신들이 1년 9개월 전에 내놓았던 판단을 스스로 뒤집었다.
해경은 사건 발생 8일 뒤였던 2020년 9월 29일 수사 중간결과를 발표하며 이대준씨가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해경은 실종자만이 알 수 있는 본인의 이름과 나이, 고향 등 신상 정보를 북측에서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 실종자가 월북 의사를 표현한 정황이 있다는 점 등의 첩보 내용을 근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이씨가 도박으로 인해 3억여원의 채무가 있었고,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현실도피 목적으로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해경의 발표는 여러 의문을 남겼다. 이씨가 밝혔다는 ‘월북 의사 표현’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대화였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씨가 조류를 거슬러 38㎞를 헤엄쳤다는 월북 방식도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해경이 이씨의 채무 사실을 공개하자 유족 측은 “빚이 있으면 전부 월북하느냐”며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반박했다.
이 때문에 당시 종전선언을 추진하며 어떻게든 북한과 대화의 물꼬를 터보려던 문재인정부가 북한 눈치를 보다가 무리수를 둔 것 아니냐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당시 문재인정부의 대응이 석연치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청와대는 국방부가 사건을 공개한 지 하루 만인 2020년 9월 25일 브리핑을 자청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직접 사과의 뜻을 전해왔다며 북한을 두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자신들이 입수했다는 첩보를 근거로 이씨가 월북 의사를 밝혔다고 연일 주장했다.
국방부는 이날 배포한 자료에서 “2020년 9월 27일 청와대 국가안보실로부터 사건 관련 주요 쟁점 답변 지침을 하달받아 ‘시신 소각이 추정되며, 정확한 사실확인을 위해 공동조사가 필요하다’고 함으로써 최초 (국방부) 발표에서 변경된 입장을 언론을 통해 설명했다”고 시인했다. 국방부가 처음에는 시신 소각 ‘확인’이라고 밝혔다가 ‘추정’으로 입장을 바꿨다는 것이다. 당시 문재인정부 청와대가 국방부에 압력을 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해경은 이날 “사건 초기 국방부 첩보를 신뢰해 월북으로 판단했다”고 밝히면서 국방부에 책임을 돌리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다만 이날 해경과 국방부 측은 “당시에는 수사를 진행하는 단계였고, 이후 수사를 해보니 월북으로 인정할 만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라며 “(새 정부의) 대북 강경 기조와 (최종 수사 결과 발표는) 전혀 상관없다”고 해명했다.
안보실 자료가 대통령기록물로 지정돼 공개에 한계가 있는 만큼 대통령실은 추가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다는 방침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자진 월북의 의도가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월북 정황이 높다고 발표한 것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밝히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씨의 형 이래진씨는 이날 국민일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을 살인방조 혐의로 고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래진씨는 “문 전 대통령과 그 이하 정보·수사·지시·보고라인 전체를 고소 고발할 것”이라며 “이들이 도·감청을 듣고도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첩보 자산을 통해 자신의 동생이 북한군에 의해 사살당했음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방치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여당인 민주당에 대해선 “국회 국방위·정보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 동생의 월북을 인정하면 기금을 조성해 보상해주겠다고 했다”며 자신의 문제제기를 막으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했다.
이래진씨는 정부가 미국 측 정보자산이라는 이유로 도·감청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데 대해 직접 미국을 설득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그는 “9월 추석 연휴 직후 4박 5일 일정으로 미 의회를 방문할 예정”이라며 “유가족이 도·감청 내용을 들을 수 있도록 미 의회의 도움을 정식으로 요청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해경이라는 국가 기관이 사람(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이 짧은 기간에 수사 결과가 바뀌는 게 말이 되느냐”며 “너무 허탈하고 착잡했다”고 말했다.
이씨 유족은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법적 조치를 포함해 향후 대응 방안을 밝힐 예정이다.
김영선 기자 ys8584@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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