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6년 세밑 노동법 날치기 때나 지금이나 정치는 그대로
극단적 정쟁은 법과 제도보다 정치 수준과 능력의 한계 때문
여당은 야당을 파트너로, 야당은 여당을 집권세력으로 각각 인정해야 적폐 멈출 것
논란 많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법안이 지난 30일 국회를 통과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군소 정당 협의체가 2020년도 예산안과 선거법 개정안에 이어 패스트트랙에 올라있던 검찰 개혁 법안 가운데 공수처 법안도 처리했다. 법적 절차에 따른 것이니 ‘날치기’라거나 ‘불법’이라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제1야당을 배제했으니 ‘일방 처리’라는 명명에서는 자유롭기 어렵겠다. 표결이 시작되자 본회의장에서 집단 퇴장한 자유한국당은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했다. 실효성은 의문시되지만 새해 벽두부터 여야 관계가 꽁꽁 얼어붙을 전망이다.
정치가 어수선한 가운데 새해를 맞으니 23년 전이 떠오른다. 김영삼정권 시절인 1996년 신한국당이 새해를 6일 남겨놓고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안을 일방 처리한 때다. 집권당이 쟁점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경우는 여러 차례 있었다. 이명박정부 시절인 2010년에만 해도 12월 8일 예산안이 날치기 통과돼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해를 넘겨 두 달 넘게 노숙투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노동법 날치기’처럼 연말을 코앞에 둔 시점은 아니었다.
당시 여당은 경제와 안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며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개정하려 했지만 야당의 본회의장 봉쇄와 국회의장 사회 방해 등 실력 저지에 부닥쳐 법안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당 의원들은 성탄절 저녁 원내총무단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호텔 4곳에 모여 있다가 꼭두새벽에 관광버스로 국회에 잠입해 새벽 6시쯤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야당은 즉각 항의농성에 들어갔고 노동계도 전면 총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명동성당 뒤꼍 성모마리아상 앞 광장에 천막을 치고 파업을 주도했다. 농성장에 몰아친 추위는 마치 이번 세밑 한파처럼 맹렬했다. 주변 바닥은 얼음 천지였고, 칼바람이 천막 속으로 몰아쳤다. 맹추위 속에서도 농성은 해를 넘기며 30일간 계속됐다.
당시 논란이 된 법안 내용을 지금 되돌아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복수노조 허용, 정리해고 법제화, 무노동 무임금 명문화 등이 핵심이었다. 지금으로선 당연하거나 재계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충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수준의 노동정책 변화였다.
하지만 당시 농성은 지지를 받았다. 1년 전 출범한 민주노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직을 결집시켰고, 노동 단체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농성을 주도했던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은 97년 9월 대선을 앞두고 국민승리21을 창당하면서 진보정당 정치의 길을 열어나갔다.
정치는 지금이나 23년 전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당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꼭 통과시켜야 할 법이라고 주장한다. 야당은 죽자사자 반대한다. 접점이 찾아지지 않으면 강행 처리와 물리적 저지를 협상과 병행해 검토한다. 그래도 안 되면 결국 강행 처리의 길을 밟는다. 야당은 결사투쟁을 외치지만 정치적 효용이 다하면 슬그머니 복귀한다.
물론 달라진 것도 있다. 이번엔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표결을 진행했다. 야당의 봉쇄나 몸싸움을 피하기 위해 의원들이 전투병처럼 일사불란하고 비밀스럽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법적 기한을 채운 다음엔 정치세력 간 협상을 통해 당당하게 제1야당의 반대를 따돌렸다. 2012년 통과된 국회선진화법 때문이다.
볼썽사나운 물리적 충돌을 면했으니 어쨌든 정치 발전이다. 그러나 국회선진화법의 절차도 디테일에서 적잖은 문제를 노출했다. 소수의견 보호를 위해 필리버스터를 허용했지만 지나치게 표결절차가 복잡해졌다. 여당이 쪼개기 국회로 이를 넘어설 수 있지만 의사일정이 기괴한 행태가 된다. 무엇보다 동물 국회는 막았지만, 숙려 기간에 여야 협상이 진전되지 않은 채 법안이 방치되는 식물 국회에서 벗어날 방안이 요원하다.
여야 정쟁이 최악으로 치닫는 건 법이나 절차의 문제라기보다 정치의 수준과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국가 전체를 바라보지 않고 진영논리에 매몰되고, 선거를 코앞에 두면 자기 세력의 이익 챙기기에 골몰한다. 그러니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품격 정치는 뒷전으로 밀린 채 악다구니 쓰고 당파적 주장을 밀어붙이려는 풍경이 반복된다. 여당은 국정 운영의 동반자로서 야당을 인정하지 않는다. 야당도 게임의 룰에 따른 집권을 수용하려 하지 않고 여당이 정책을 펼 기회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패악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법과 절차를 아무리 바꿔도 말짱 도루묵이 될 수밖에 없다.
한파까지 몰아친 터라 새해를 맞는 마음들이 헛헛하다. 새해가 밝았다는 느낌도 멀리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봐야겠다면 사치인가.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중략)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박두진의 ‘해’)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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