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화재사고에…설 명절에도 웃지 못한 사람들

설 명절 마지막 날인 12일 광주 광산구 광주송정역에서 한 여성이 귀경객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손꼽아 기다리는 명절이지만 지난 설 연휴가 반갑지만은 않은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를 겪으며 평범한 일상을 회복하지 못한 이들이다. 국민일보가 인터뷰한 네 명의 이웃은 가족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거나, 주변에 의지할 사람 하나 없어 힘겨운 명절을 보냈다고 털어 놓았다.

서울 월셋집에 살던 박준용(30‧가명)씨는 부모님에게 손을 빌리지 않기 위해 2021년 전셋집을 구했다. 그는 지난해 말 전세계약이 끝났는데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말 그대로 ‘전세사기’를 당한 것이다. 박씨는 12일 “설 명절 귀향을 위해 호남선 열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부모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 고민했다”며 “걱정하실까봐 끝내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대부분이 박씨와 같은 사회초년생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6월부터 지난달까지 전세사기 피해를 신고한 1만944명 중 73%가 20~30대로 집계됐다.

박씨는 “너희 전셋집은 괜찮느냐”고 묻는 부모에게 수차례 거짓말을 했다. 집주인과 나눠 내는 공과금이 밀려 수도와 전기가 끊길 상황에 놓였지만 평소처럼 부모에게 명절 용돈도 드렸다고 한다.

이번 명절이 서러웠던 건 A씨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2월 25일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서 발생한 아파트 화재 피해자인 A씨는 “이번 설은 우리 집에서 보내자”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화재가 발생해 입주민 2명이 숨지는 등 피해가 발생한 서울 도봉구의 한 아파트에서 지난해 12월 26일 경찰과 소방 당국이 합동 현장감식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화재가 일어난 지 두 달이 다 돼가지만, 복구 작업은 더디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A씨는 “아파트에 남은 그을음은 우리 가족에게 그날의 아픈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상처”라고 말했다. A씨를 비롯한 피해 입주민들은 화재 공간에 대한 청소를 다시 해달라고 아파트 측에 요구하고 있다.

투자 사기로 7000만원을 빼앗긴 장모씨는 외로움과 싸우며 명절을 버텼다. 전국 단위 조직이 범행을 벌인 탓에 수사기관은 2년째 범인을 쫓고 있다. 30대 미혼인 장씨는 최근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는 “꼭 금전적인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네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해주는 가족이 있으면 좋겠다”며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명절은 내게 더 외로워지는 시간”이라고 전했다.

입원 중이던 딸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최모씨도 슬픔에 빠져 명절을 보냈다. 최씨의 딸은 폰히펠-린다우 증후군이라는 희소질환 진단을 받고 치료 중 사망했다. 최씨는 병원 측 책임을 주장하며 2년 가까이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다.

최씨는 최근 의료 사고에 대한 처벌 부담을 완화하겠다는 정부 방침을 듣고 억장이 무너졌다고 했다. 최씨는 “명절 때면 딸이 전을 부쳐 먹여주던 게 생각이 난다”면서 “납골당에서 딸 사진을 보고 ‘아빠가 억울함을 꼭 풀어줄게’라고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에게 닥친 사고나 위기의 원인은 다양했다. 전세·투자 사기나 의료 사고 사례의 경우 피해자를 위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경찰의 후속 조치가 미흡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다양한 어려움을 지닌 이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명절에 대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명절이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의 어려운 이들에게도 따뜻한 정을 나누는 시간이 될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재환 기자 j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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