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누더기를 입은 한 남자가 책을 들고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

이제 설 연휴도 끝나갑니다. 집에 있다 보니 계속 먹기만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서 끈끈한 정,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설날 아침 가족 예배에서 에벤에셀 하나님, 즉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돌아가신 할머니, 아버님과도 함께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우리 가정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억하자고 기도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 자체가 주의 크신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됩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엔 책의 저자와 그 책들, 그리고 신학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중엔 ‘벤허’와 ‘천로역정’이 눈에 띕니다. 벤허는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천로역정은 천국 가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천로역정의 경우는 주인공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지, 또 어떻게 달리고 또 달려서 영광의 문에 이르게 됐는지를 보여줍니다. 나그네 인생을 살면서 우리 역시 영광의 문에 서게 되겠지요. 바라기는 그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 여정을 마쳤으면 좋겠습니다. 최후의 에벤에셀을 위하여!

링컨 대통령 출생
1809년 2월 12일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자 노예해방선언문의 저자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켄터키주 호젠빌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토머스가 확고한 기독교적 신념의 소유자여서 매우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노동을 했던 링컨은 학교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독학으로 변호사가 됩니다. 이후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런 가운데 1850년대에 노예 문제가 전국적 이슈로 떠오르자 1856년 노예 반대를 표방하면서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입당, 그해 대선의 공화당 후보 플레먼트를 지지하면서 그의 웅변이 알려지게 됩니다. 링컨은 1858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 입후보해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 더글러스와 경쟁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더글러스와의 공개 논쟁에서 그는 “갈려서 싸운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선거에는 패했으나 7회에 걸친 공개토론으로 그의 명성은 더 많이 알려져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받았습니다.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한 링컨은 “나의 최고 목적은 연방을 유지해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제 문제는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나 다음 달 섬터 요새에 대한 남군의 공격으로 남북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전황은 처음에는 북군에게 불리했으나 1862년 9월 남군이 수세로 몰린 때를 노려 노예제 폐지를 예고하고 외국의 남부연합국 승인을 저지함으로 북부와 해외 여론을 자기편으로 유도, 전황을 유리하게 전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링컨은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국립묘지 설립 기념식 연설에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멸의 말을 남겼습니다. 전쟁 중인 1864년 대선에서는 재선 전망이 어려웠으나 US 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승리가 계속된 것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서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1865년 4월 9일 남군 사령관 R E 리가 항복함으로 남북전쟁은 끝났습니다. 종전이 가까워짐에 따라 관대한 조치를 베풀어 남부의 조기 연방 복귀를 바랐지만 4월 14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연극관람 중 피격당해 이튿날 별세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그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복음주의 개신교도로서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반면, 링컨이 소속된 교파가 무엇인지 정확하지도 않으며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초기에는 불분명한 종교관 탓에 오히려 성직자들의 공격을 받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미국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지난해 8월 초 휘튼대 역사학 교수인 로버트 트레이시 맥켄지 박사가 쓴 “미국의 ‘첫 번째 복음주의 대통령’은 전혀 기독교인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글을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맥켄지 박사는 “링컨 논쟁은 그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며 “링컨은 교회에 출석한 적이 없었지만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그의 독실한 신앙을 주장했다. 고인이 된 대통령이 성경을 광범위하게 인용했지만 비기독교인들은 그가 성경의 내용을 의심한다고 항의했다”고 했습니다.


‘현대 신학의 아버지’
1834년 2월 12일 독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별세했습니다. 그는 자연과학의 발달로 종교가 자기 자리를 잃어갈 때 그 자리를 되찾아 주고,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가 죽은 바로 다음 날 베를린대학교 신학 교수 어거스트 네안더는 학생들에게 “언젠가 그에게서 기원을 찾는 교회 역사의 새로운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슐라이어마허의 관심사는 매우 포괄적이었습니다. 플라톤을 권위 있게 번역했고 셀 수 없이 많은 설교를 했으며 신약성경 연구서와 해석학 교본, 조직신학, 예수의 생애, 교회사 등을 저술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관심의 이면엔 한 가지 근본이 자리합니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이 신뢰를 얻고 시의성이 있도록 기독교 신앙을 재진술하기 원했습니다.

그는 당시 영향을 끼치고 있던 칸트와 헤겔의 종교관을 비판합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가 인간 삶의 전 영역과 관계돼야 함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근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던 기독교를 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모라비아파 경향을 띠고 있었던 개혁파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학에는 모라비아파 경건주의의 흔적이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당시 우세했던 합리주의 때문에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들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낭만주의의 도움을 받아 이 상황에서 벗어났습니다.

낭만주의는 인간에게 냉정한 이성의 것이 있다고 주장했고 합리주의가 비인간화를 초래하고 있다고 느끼는 젊은 세대에 낭만주의에 통달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낭만주의자들의 통찰을 이용해 합리주의가 가져다준 회의와 교착 상태에 빠져나갈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첫 저작인 ‘종교론’은 종교가 인간생활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종교란 합리주의자들과 정통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지식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칸트가 말한 것처럼 도덕의 체계도 아니었습니다. 종교는 순수이성이나 실천이성, 도덕적 이성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 직관과 감정에 기초를 둔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종교는 이성을 사용하는 학문이 아니며 의지를 사용하는 도덕도 아닙니다. 감정을 사용해 무한, 즉 신적인 것을 느끼고 맛보는 것입니다. 또 종교는 감각과 자신의 취향과도 관계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에게 종교는 오직 신적인 것, 무한한 것, 우주를 느끼고 맛보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슐라이어마허는 ‘주관주의적 신학의 창시자’라고도 부릅니다.

그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기독교 신앙’은 자유주의 개신교이 핵심 진술이면서 흔히 칼뱅의 ‘기독교 강요’와 나란히 개신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이 책은 여러 교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개별적인 것의 해석은 전체와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전체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부분적으로만 해석하면 올바른 이해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사가인 후스토 곤잘레스는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은 지대했다”면서 많은 이들이 종교를 과거의 유물로 믿던 시대에 사람들은 그가 설교하는 교회로 많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19세기 미국 프린스턴 보수신학의 보루였던 찰스 하지는 그가 베를린에 있을 때 종종 슐라이어마허의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영국 복음주의 신학자인 마이클 리브스는 “슐라이어마허는 예수를 사랑했다. 여기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사고가 굉장히 복합적이고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자들 중에서도 거인이다. 교회는 그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오만하게 그를 무시하거나 그의 신학에 설득될까 조바심을 낸다면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의 유산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벤허’는 원래 책이었다
1905년 2월 15일 ‘벤허’의 작가 루 월리스가 77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월리스는 유명한 불가지론자였던 로버트 잉거솔과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논쟁하던 중 예수의 신성에 대한 의심과 기독교인의 어리석음에 대한 주장을 듣고 자신이 이 문제에 무지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를 탐구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후 5년여간 치밀한 자료 조사와 집필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벤허’를 출간했습니다. 작품 속에서 예수와 벤허는 단 두 번 만날 뿐이지만, 작품 전체를 통틀어 두 사람의 생애는 긴밀히 연결되고 벤허는 자신의 고난을 통해 예수의 존재 의미를 깨달아갑니다. 책은 역사 종교 소설로 1880년 출간 이후 10년간 30만 부 이상 판매돼 월리스는 1800년대 가장 유명한 기독교 작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벤허’는 처음에는 비평가들로부터 차가운 반응을 받았습니다. 당시 미국 문학계는 이미 리얼리즘 시대에 접어들었기에 역사소설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점차 판매량이 증가했고 많은 대중이 읽기 시작하면서 판매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더니 결국에는 베스트셀러 반열까지 올랐습니다. ‘벤허’는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가 출판될 때까지 50년 넘게 미국 소설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벤허는 로마 제국 치하 예루살렘의 정치적·사회적 배경과 그 속에서의 예수의 일생이 더해진 소설입니다.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배신과 복수, 유대 청년 벤허의 고난과 청년 예수의 운명이 절묘하게 엮이며 믿음의 근본을 파고들었습니다. 특히 전차경주 장면으로 대변되는 웅대한 스펙터클과 두 여인 사이에서의 흥미로운 로맨스까지 가미돼 대중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벤허는 연극으로 각색돼 브로드웨이에서 20년 이상 장기 상연되기도 했습니다. 또 1959년 MGM 영화사에서 영화로 제작했는데 유다 벤허 역을 맡은 찰턴 헤스턴과 메살라 역의 스티븐 보이드가 열연하면서 수천만 명의 관객을 모았고 1960년 아카데미 11개 상이라는 역사상 최다 수상을 이루면서 책 판매량도 다시 증가했습니다. 벤허는 소설로서는 교황 레오 13세의 축성을 받는 최초의 영예를 얻기도 했습니다.

루 월리스는 작가이자 군인, 법률가, 정치가였습니다. 1827년 인디애나주 브룩빌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부터 시와 짧은 소설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냥과 낚시를 즐기는 숲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대담한 행동력과 낭만적 기질, 혈기왕성한 행동력의 소유자로 1845년 멕시코와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자 아직 학생임에도 스스로 의용군을 모집해 출정하려 했습니다. 이에 반대한 아버지가 학비 지원을 중단하자 16살의 나이에 자립해 지방신문 기자로 취직하는 등 사회참여 의식이 활발했습니다.

30세 때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61년 남북전쟁 당시에는 인디애나주 연대장으로 출정해 도넬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국민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샤일로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변호사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실행자, 멜란히톤
1497년 2월 16일 독일의 학자이자 개혁가인 필리프 멜란히톤이 바덴주 브레텐에서 태어났습니다. 멜란히톤은 루터와 때로는 동맹(요한 반 에크와 황제 카를 5세에 맞서 루터를 변호)이었고, 때로는 적(루터는 성찬에 대한 그의 견해로 그를 매질했지만 임종 시 사과)이었습니다.

150㎝ 키에 목소리는 가늘고 약간의 언어장애까지 있었던 멜란히톤은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 운동에 일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스무 살에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로 초빙돼 루터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쳤습니다. 루터와 달리 온화하고 온건한 성품이었지만 자신보다 연장자인 루터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루터가 주창한 개혁은 비텐베르크의 종교생활에서 전혀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멜란히톤은 동료 칼슈타트와 함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성에서 피신해 있을 때 본격적인 개혁 작업을 단행합니다.

많은 수도사와 수녀들이 수도원에서 나와 결혼합니다. 예배 의식은 단순화되었고 라틴어 대신 독일어가 사용됐습니다.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와 금식일, 금욕 일도 폐지합니다. 멜란히톤은 평신도에게 떡과 포도주를 부여하는 2종 성찬을 시행했습니다. 멜란히톤은 장 칼뱅의 ‘기독교 강요’보다 15년 앞서 ‘신학총론’(1521)을 펴내 종교개혁 신학을 체계화합니다. 그는 책에서 “모든 철학은 어둠과 비진리”라고 비판하면서 ‘독일의 교사’ ‘유럽의 교사’로도 불립니다.

존 버니언, ‘천로역정’을 쓰다
1678년 2월 18일 청교도 설교자 존 버니언이 성경을 제외하고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인 ‘천로역정’을 출간합니다. “누더기를 입은 한 남자가 손에는 책을 들고 등에는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로 시작되는 이 우화는 버니언 자신의 회심 과정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영국의 설교자이자 작가인 버니언(1628~1688)은 베드퍼드 인근 엘스토우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가업을 이어받았습니다. 학력은 초등학교 교육이 전부입니다. 당시 영국은 내란과 공화정 그리고 다시 왕정복고로 이어지는 혼란기였습니다. 버니언은 16세 나이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청교도혁명에 가담해 의회파에 들어갔습니다.

1647년 전쟁이 끝나자 집으로 돌아온 그는 청교도 출신 아내 메리와 결혼하고 이때부터 아내의 영향으로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653년 그는 비국교도파 회중 목사이자 베드퍼드의 위대한 설교자인 기퍼드를 만났는데 이를 계기로 신앙이 더 돈독하게 됐습니다.

1655년 기퍼드가 죽자 버니언은 회중들의 간청으로 평신도로서 설교하게 되는데 이때 큰 감동을 주어 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찰스 2세 당시 왕정으로 복고된 상황에서 국교회(성공회)를 제외한 교회의 집회는 금지돼 있었습니다. 1660년 결국 버니언은 비밀집회 금지령 위반으로 체포돼 12년간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버니언은 ‘넘치는 은총’을 비롯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또 순전히 성경만을 사용해 ‘천로역정’의 초고를 완성합니다.

1678년 버니언은 다시 두 번째 투옥되는데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로역정’(天路歷程·The Pilgrim's Progress) 전편(前篇)을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1684년 2부가 나오면서 완성됐는데 간결하면서도 소박한 문투로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의 삶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처자를 버리고 성경 한 권을 들고 파멸의 도시를 떠나 낙담의 늪, 죽음의 계곡, 허영의 거리 등에서 수많은 유혹과 시련을 통과하며 천국의 도시에 이르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이 지나는 길’이라는 뜻을 지닌 책 제목대로 신앙의 형성 과정을 형상화한 종교적 우의소설(寓意小說)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임스 게일 선교사가 번역 출간한 천로역정 수록 그림이다. 당시는 '텬로력뎡'이란 이름으로 나왔다.

책은 삽시간에 웨일스 어를 비롯해 네덜란드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돼 주변국으로 퍼져나갔고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120개 국어로 번역,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895년 캐나다 선교사이자 장로교 목사인 제임스 게일(James S. Gale·1863~1937)이 번역, 소개했습니다. 당시 외래 문학들은 중국어나 일본어 원고를 번역해 소개됐지만 ‘천로역정’은 영어 원고를 번역했으며 한국 근대 첫 번역 소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천로역정’이란 제목은 게일 선교사가 번역한 제목 그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참고서적]
<자유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김용주 지음/좋은씨앗
<종교개혁사>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엄성옥 옮김/은성
<처음 읽는 신학자> 마이클 리브스 지음/장호준 옮김/복있는사람
<천로역정> 존 버니언 지음/C J 로빅 편집/마이크 윔머 그림/최종훈 옮김/포이에마
<현대교회사>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엄성옥 옮김/은성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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