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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은 팔아야겠고, 오해받긴 싫고”… 기업·무보 ‘러시아’ 딜레마 [스토리텔링경제]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 수출 ↓
선적은 중단·무역보험은 일단 유지
카자흐스탄 등 제3국 우회 수출로 활로 모색


러시아로 상품을 수출하는 한국 기업들의 ‘눈치 보기’ 작전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유럽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들은 ‘탈(脫)러시아’ 행보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만 한국 기업들은 대놓고 말을 못 꺼내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에 현물을 지원하거나 기부금을 보내는 등 지지를 표하면서도 러시아 시장 철수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분위기다. 그나마 가장 전향적인 조치가 ‘러시아에 대한 선적을 중단한다’ 정도다.

일부 기업들은 여전히 러시아 수출을 지속하고 있기도 하다. 대 러시아 수출액은 감소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수준이 이어지고 있다. 대신 이를 언급하는 일만큼은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러시아 수출 기업에게 수출보험을 제공하고 있는 한국무역보험공사 역시 이런 이야기를 부담스러워 한다. 자칫 정부가 러시아 수출 기업을 지지하거나 러시아를 지지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기조를 명분 삼아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글로벌 기업들과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러시아 수출 줄어도 무역보험은 유지…왜?
한국 기업들의 대 러시아 수출액은 전쟁 발발 이후 감소세다. 29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 3월 러시아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9.7% 감소했다. 4월 러시아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1.2%나 급감하며 우하향 곡선을 그렸다. 미국의 대러 제재 조치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 컴퓨터, 정보통신, 센서 및 레이저, 항법 및 항공전자, 해양, 항공우주 등 7개 분야의 57개 기술이 적용된 제품의 러시아 수출을 제한했다. 비단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이 아니더라도 이 제재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수출 자체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지표가 무역보험공사에서 제공하는 무역보험이다. 무역보험은 기업 수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보장하는 수단이다. 단기 수출보험의 경우 중소기업은 100.0%, 중견기업은 97.5%, 대기업은 95.0%까지 돌려받지 못한 대금을 무역보험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 러시아에 수출하지 않으면 이런 수단은 더 이상 필요가 없지만 관련 기업들의 무역보험 가업 건수는 감소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은 이전과 유사한 수준의 수출 보험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사태만 해결되면 이전과 같이 활발한 무역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로 수출보험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불확실성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인 무역보험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기업은 없다”고 말했다.

무역보험공사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대 러시아·우크라이나 수출보험을 이전처럼 유지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러시아 수출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수출 사고가 계속 발생하면서 지급액이 늘어나는 점도 머리를 싸매게 만든다. 올 1~6월 사이 러시아 수출과 관련해 발생한 사고는 지난 22일 기준 19건으로 파악됐다. 지난해 러시아 수출 사고 건수(11건)를 이미 넘어섰다. 발생한 손실액만도 510만 달러에 달한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사고는 계속해 발생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 지침을 변경하기는 했다. 지난 3월부터는 러시아에 수출하는 기업의 수출보험 심사를 계약 건별로 승인하도록 지침을 바꿨다. 이전에는 보상·보증 한도를 정한 후 같은 수출업자와 한도 내 거래를 했을 때는 별도로 승낙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보상비율도 대기업의 경우 70% 수준까지 낮췄다. 그렇더라도 단기간에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하는 일은 힘들다는 의견이 업계에서는 지배적이다.

즉각 철수는 무리…제3국 통한 활로 모색
해외 상황을 봐도 설득력이 있다. 러시아 시장 철수를 시작한 기업들은 대러 제재를 공언한 미국과 유럽연합(EU)에 기반을 둔 곳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정부가 러시아 경제 제재를 발표하는 등 명확한 노선을 취하자 이에 맞춰 시장 전략을 내놓은 것이다.

스타벅스는 지난달 24일 러시아 내 130개 매장의 영업을 영구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구글도 러시아 자회사를 파산 신청하는 등 2005년 러시아 진출 이후 17년 만에 탈러시아 행보를 시작했다. 애플도 지난 3월 아이폰 등 제품 판매를 중단하고 애플페이 서비스를 중단했다. 그 외 테슬라, 엑손모빌 등도 탈러시아를 공언했다. 도이치방크, 지멘스 등 유럽 기업들 역시 러시아 사업을 축소하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 기업은 명확한 입장을 취하기 어렵다. 정부의 외교적 판단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선적은 중단하되 최소한의 영업을 이어가는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미국은 정부 기조가 명확하기 때문에 기업의 철수 결정이 쉽다. 하지만 한국은 제3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쪽 모두를 신경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제적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삼성전자는 2007년부터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해왔다. 점유율 30.0%로 2위인 애플(15.0%)의 2배 수준이다. LG전자도 삼성전자와 러시아 가전 시장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다. 일부 기업은 러시아 직접 수출 대신 카자흐스탄 등 제3국을 통한 수출을 통해 활로를 찾은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4월 카자흐스탄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9.6%나 급등했다. 무역보험공사 관계자는 “한국 기업은 적극적으로 수출에 나서기보다는 기존 판매량을 유지하는 수준의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종=권민지 기자 10000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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