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의 진격 속도가 더뎌진 주된 이유로 ‘라스푸티차(Rasputitsa)’가 거론된다. 라스푸티차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같은 동유럽에서 봄·가을에 땅이 진흙탕으로 변해 통행이 어려워지는 시기를 말한다. 녹은 눈과 비로 진흙이 생겨 비포장도로에서 일반 승용차는 물론 군용 특수 장비인 장갑차의 통행도 어려워진다.
기후의 영향을 받는 동유럽 환경을 이미 알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3월 말 해빙기 이전 ‘2월 침공’을 감행했지만 속도가 지체돼 난항에 빠졌다. 수천 대의 전차·탱크가 진격하려면 단단한 땅이 필요한 탓이다. 라스푸티차로 러시아군의 병력 이동이 지체되는 정황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러시아 장갑차 가둔 라스푸티차
주요 외신들은 러시아의 진격이 늦춰진 주된 이유 중 하나로 라스푸티차를 꼽고 있다. 지지부진한 지상전보다 해상·공중 작전의 비중을 늘리기 시작한 이유도 라스푸티차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침공 방식을 ‘속도전’에서 도시 점령을 위한 ‘포위 전략’으로 전환했다는 얘기다.
우크라이나 국토의 80%는 비옥한 흑토 지대다. 특히 우크라이나 동부 러시아 접경 지역은 비옥한 평야 지대로, 봄이 되면 비옥토가 녹으면서 진흙 범벅으로 변한다. 여기에 장맛비가 쏟아지면 진흙탕이 거대한 늪 지대가 된다. 많게는 성인의 종아리 깊이까지 빠질 수 있다. 진창의 평균 깊이는 10~15㎝로 측정된다.
라스푸티차는 통상 3월 말 해빙기와 10월 초가을 장마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올해의 경우 동유럽 기후가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예년보다 빠르게 따뜻해지면서 라스푸티차의 시기를 앞당겼다. 유럽연합(EU) 기후 관측 프로그램인 코페르니쿠스의 데이터를 보면 동유럽 기온은 1월 평년보다 1~3도 더 높고 습해졌다.
러시아 장갑차는 이런 지형을 고려해 설계됐다. 주력전차(MBT)인 T-90이 대표적이다. T-90은 46톤으로 미국의 M1이나 독일 레오파드 2A6 등 다른 나라 장갑차와 비교하면 훨씬 가볍다. 그런데도 러시아군은 라스푸티차에 발목을 잡힌 것으로 보인다.
SNS에서 러시아군의 탱크나 장갑차가 진흙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영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남동부 로스토프주에서 탱크 12대가 진흙탕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다.
터키 공영방송국 TRT은 2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이 현재까지 기갑부대를 대규모로 진격시키지 못한 채 소규모 공수부대 파견과 정찰부대를 투입해 왔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군이 폭탄이나 미사일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에 집중하는 이유도 주요 기동부대가 라스푸티차에 갇혀 돌파구가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라는 게 TRT의 추측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당했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 군사전문가는 TRT에 “과거 전쟁을 되돌아보면 러시아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도 라스푸티차를 돌파하지 못해 고전했고, 결국 패전했다”며 “우크라이나 도로가 그때보다 현대화됐지만 봄이 가까워질수록 우크라이나의 기후와 지형이 전쟁의 결과를 바꿀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말대로 러시아는 근·현대 전쟁에서 라스푸티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1941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바르바로사 작전을 수행하던 나치 독일군도 라스푸티차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모스크바 진격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그때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300만 독일군은 전차 전면부에 통나무 다발을 싣고 다녔다. 모스크바 160㎞ 앞까지 진격한 시점부터 진흙탕을 만날 때마다 통나무 다리를 놓는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그때마다 독일군이 자랑하는 기갑사단은 멈춰 섰다. 보급 트럭까지 진흙탕에 빠져 식량 후송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 사이 시간을 번 소련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1812년 6월 모스크바 원정에 나섰던 나폴레옹 역시 라스푸티차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나폴레옹이 지휘한 50만명 규모의 프랑스군은 마차와 대포가 진흙탕에 빠지며 진격 3개월이 지나서야 간신히 모스크바에 입성할 수 있었다. 간신히 모스크바에 이르렀지만 불에 탄 도시는 텅 비었고, 강행군을 거듭했던 프랑스군은 전투 한 번 제대로 치르지 못했음에도 전력 절반 가까이 소실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추위와 전염병 닥치자 나폴레옹은 퇴각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13세기 기록에서도 라스푸티차가 러시아로 진격한 침략군의 진격을 막은 정확을 찾을 수 있다. 몽골 2대 칸 우구데이의 명령을 받은 바투와 수부타이가 1235년 유럽 원정길에 나섰다가 주요 기동 수단 이었던 말이 진흙탕에 빠지며 후퇴했다는 기록이 있다.
라스푸티차는 러시아에서 외세의 침략을 막아준다는 의미에서 ‘진흙 장군’으로도 불린다. 역사적인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켜주며 든든한 버팀목이 됐던 라스푸티차가 역설적이게도 이번엔 러시아를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는 셈이다.

폭설 예고… 러시아 공격 지체 예상
러시아군이 포격을 퍼붓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북부 하르키우와 도네츠크·루한스크 등에 폭설과 강풍이 예고됐다. 와도네츠크·루한스크는 친러 분리주의 반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폭설과 강풍으로 시야 확보가 어려워지면 러시아군의 공격은 더 지체될 수밖에 없다.
미국 CNN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동부 일대에 이번 주말까지 강풍을 동반한 폭설이 내린다. 남부 흑해에서 저기압이 북상하면서 4~5일 폭설이 쏟아질 전망이다. 예상 적설량은 15㎝ 이상이다.
이 기간 대부분 지역에 구름이 짙게 끼고 사흘간 평균 풍속 40~50㎞의 강풍이 지속될 것으로 관측된다. 해빙기가 시작되면 쌓인 눈이 라스푸티차를 형성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CNN은 “러시아의 군사 장비가 진흙 속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라스푸티차는 우크라이나 최고의 방어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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