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생명, 일본은 죽음’이라는 양국 놀이문화의 차이를 주로 강조했는데 일본 신문이 그건 싹 빼버렸더라고요.”
향토민속학자인 임영수(57) 연기향토박물관장은 지난 7일 세종시에 있는 놀이연구소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이같이 밝혔다. 임 관장은 지난달 29일 일본 경제지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이름이 오르면서 갑작스레 홍역을 치렀다. 스즈키 쇼타로 서울지국장이 쓴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비추는 일본의 잔영’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국 어린이 놀이의 대부분은 식민지 시대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임 관장의 발언이 인용된 탓이다.
문제의 칼럼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여러 놀이가 일본에서 유래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임 관장은 보도 이후 ‘일본한테 얼마를 받았느냐’는 비아냥과 함께 온갖 욕설이 담긴 문자를 받았다. 관련 기사에는 임 관장을 성토하는 댓글이 이어졌다. 주로 ‘명확한 근거도 없이 일본에 유리한 주장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비판이었다.

임 관장은 “일본 신문의 취재에 응할 때 어느 정도 예견했던 일”이라면서도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일본과 한국의 놀이문화 차이를 분명히 강조했는데 그 부분은 쏙 빠졌다”며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취사선택’을 통해 발언의 전체 취지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군국주의’ 그림자 드리운 일본 놀이
임 관장은 니혼게이자이 인터뷰에서 일본 놀이는 군국주의 문화 속에 만들어져 죽음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아이들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점을 역설했다고 말했다. 한국 놀이로 알려진 것 중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온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 것은 맞지만 인터뷰에서 주로 강조했던 내용은 아니라고 했다.
임 관장은 “일본 놀이는 메이지유신 이후 청일·러일전쟁 등 군국주의 시기에 주로 만들어졌다”며 “죽음이나 인신매매 등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문호를 개방하는 과정에서 서양 놀이가 들어왔고, 여기에 일본식 군국주의가 스며들면서 폭력적인 형태로 변형됐다는 게 임 관장의 입장이다.

임 관장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오징어게임’ ‘구슬치기’ 등의 한국 놀이가 일본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하는 건 사실이다.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폭력성이 짙은 일본 놀이에 대비해 한국 놀이의 장점을 부각하려는 목적이 컸다고 했다. 그는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폭력적인 일본 놀이의 특성을 제대로 보여줬다”며 “금을 밟으면 죽고 다리가 풀어지거나 넘어져도 죽는다. 상대가 다 죽어야 내가 이기는 놀이”라고 말했다.
한국 놀이 특성은 ‘생명 지향’
임 관장은 “한국 전통놀이는 죽음을 내포한 일본 놀이와 달리 풍년과 협동 등 생명을 지향하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강조했던 대목이다. 그러나 이 발언은 인용되지 않았다. 그는 “그나마 ‘일본의 놀이가 왜 한국에 들어왔는지 그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나라를 빼앗기면 문화도 뺏긴다’는 제 답변이 포함돼서 항의는 따로 하지 않았다”고 했다.
임 관장은 한국과 일본 놀이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오징어게임 속에 나오는 ‘죽음의 줄다리기’를 예로 들었다. 드라마에선 높은 곳에서 외줄로 줄다리기를 해서 지는 쪽은 모두 떨어져 죽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임 관장은 한국의 전통 줄다리기는 외줄이 아니라 심줄에 여러 줄을 묶어서 하는 방식으로 일본식 줄다리기와 차이가 있다고 했다.
대표적 사례가 ‘강다리’라는 전통 줄다리기다. ‘강’은 줄, ‘다리’는 당긴다는 의미다. 남자와 여자가 편을 나눠서 진행하는데 남자가 이기면 힘이 세지고 여자가 이기면 풍년이 들고 평화가 찾아온다. 첫 번째 판에는 여자들이 져준다. 하지만 이후 노인이 가시나무 가지로 남자들의 손을 때려서 여자가 이기도록 한다. 모두가 풍년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다 함께 어울려 놀면서도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게 특징이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강강술래’는 여성의 순산을 염원하는 의미가 있고, 정월 대보름에 하던 ‘다리밟기’는 마을에 있는 다리가 튼튼한지 점검하는 동시에 다릿병을 앓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던 놀이라고 한다. 세시풍속 중 하나인 ‘성밟기’ 역시 성벽을 단단하게 다지는 동시에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고 임 관장은 설명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위안부 관련설 촉발도
그동안 한국의 놀이문화를 일본과 비교·연구해온 임 관장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 놀이가 한국 고유의 놀이로 탈바꿈했다’는 주장을 펴왔다.
임 관장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일본의 ‘달마상이 넘어졌다’와 비슷하다는 점은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이 놀이가 무궁화 보급에 앞장선 독립운동가 남궁억 선생의 영향으로 변형된 것이라고 본다. 남 선생이 일제 강점기 당시 아이들이 일본 놀이를 하는 걸 보고 가사를 바꿔 놀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재일동포인 홍양자씨가 ‘우리 놀이와 노래를 찾아서’에서 제주도를 답사해 채록한 연구 결과를 주장한 데 근거한 것이다.

앞서 그는 초등학생들이 주로 하는 놀이인 ‘우리 집에 왜 왔니’가 일제 강점기 당시 위안부 강제동원 사건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꽃 찾으러 왔단다’라는 노랫말이 소녀를 위안부로 데려가는 장면을 묘사한다는 취지였다. 임 관장이 욕먹을 각오를 하고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계기는 “한국은 아직도 인신매매 놀이를 하고 있느냐”는 일본 놀이학자의 한마디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국 초등학생들이 ‘우리 집에 왜 왔니’를 자주 한다고 말한 뒤 들은 얘기였다.
이후 임 관장은 초등학교 교과서를 전수조사한 뒤 일본에서 유래한 놀이를 빼야 한다는 의견을 교육부에 냈다. 교육부는 임 관장과 놀이 관련 일부 민간단체의 지적에 일부 타당한 면이 있다고 판단하고 한국민속학회에 2019년 12월~2020년 4월 연구용역을 맡겼다.
민속학회는 ‘초등 교과서 전래놀이의 교육적 적절성 분석 정책연구’라는 이름의 보고서에서 10개 놀이를 검토했다. 이 중 ‘우리 집에 왜 왔니’와 위안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지나친 비약”이라며 일축했다. 그러면서도 “일본 놀이 ‘하나이치몬메’와 많이 닮았다. 일제 강점기에 전해지면서 우리의 놀이에 덧붙여 정착된 것 같다”며 일본의 영향을 일부 받은 건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일본 유래설에 대해서는 “서구는 물론 동아시아의 보편적 놀이로 일본의 독특한 놀이가 아니다”며 “일본에서도 서구의 영향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검토 의견을 냈다. 민속학회는 남 선생의 영향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민속학회는 일부 놀이의 명칭이나 선율 등이 일본에 영향을 받은 면이 있다고 했지만 일본에서 전적으로 유래했다고 인정한 놀이는 하나도 없다. 다만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처럼 놀이 명이나 가사에서 일본 영향이 논란이 되는 경우 명칭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또 일본식 음계나 선율을 가진 ‘고무줄놀이’ ‘쎄쎄쎄’ 등을 전면 재검토하고 민요나 창작 동요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용역보고서 결론이 교육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임 관장은 용역 연구에 참여한 전문위원의 자격 논란 등을 이유로 교육부 결론에 반발하고 있다.

“부끄러운 역사도 잘 기억해야”
임 관장이 이처럼 민감할 뿐 아니라 환영받기 어려운 연구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가 있다. 그는 2004년 겪은 충격적인 사건 때문에 한국과 일본 놀이 연구에 뛰어들게 됐다고 했다. 당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한·일 문화 교류의 행사가 열렸는데, 한국과 일본이 각각 고유의 놀이 시범을 보이는 시간이 있었다. 이때 일본 대표가 선보인 게 한국 전통놀이로 꼽히는 ‘비석 치기’였다. 임 관장은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이었다”고 회상했다.
임 관장은 “교과서에 한·일 놀이가 뒤섞여 수록된 걸 보고 문제의식이 커졌다”고 했다. 그는 일본에서 2013년에 발간된 ‘일본의 놀이’라는 교과서를 보여주면서 한국과 일본의 연구 격차를 설명했다. ‘일본의 놀이’에는 59종의 놀이를 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유래와 기원 등 역사적 배경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임 관장은 “반면 우리 초등학교 교과서는 놀이 유래 같은 건 하나도 없다”고 성토했다.

임 관장이 운영 중인 연기향토박물관 앞마당에는 ‘황국신민서사의 비’가 세워져 있다. 지역의 초등학교 운동장에 묻혀 있던 걸 힘겹게 구해온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한 맹세가 적힌 비석이다. 발견할 경우 대부분 깨부수기 때문에 잘 보존된 비석을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무거운 비석을 가져다 놓은 이유를 물었다. 임 관장은 “부끄러운 역사라고 파묻어야 하느냐”며 “후세를 위해 보존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세종=글·사진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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