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집단학살 정책에 가담한 나치의 고위 관리였다. 유대인을 식별해 집단수용소로 보내서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인물이다.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에서 숨어지내던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은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공무원으로서 국가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복종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였고, 그저 승진을 위해 열심히 일했을 뿐이라고... 그러나 그는 결국 사형대 위에 올랐다.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이 재판을 관찰했다. 그리고 ‘악의 문제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로 평가받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죽이려고 나선 악마가 아니다. 평범하고 순종적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던 충실한 관료에 지나지 않는다’며 ‘악의 평범성’을 얘기한다.
‘악의 평범성’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낸 이유는 이 현상이 현재에도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평범했던 사람이 극악무도한 연쇄살인을 저질렀다더라, 함께 동거동락 했던 이웃이 수없이 많은 성착취물을 제작한 사람이더라’라는 류의 자극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무수히 많은 평범한 이웃이 아무렇지 않게 범죄에 빠져들고 있다.
“저는 보이스피싱인줄 몰랐어요. 알바를 구하려고 유명한 앱에 구직자로 등록했다가 연락이 와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혼하고 홀로 세 아이를 키우던 30대 아버지가 눈물로 호소한다. 그도 한때는 잘나가던 치킨집 사장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치킨집을 접고 알바를 전전했다.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열심히 뛰었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결국 ‘고액’ 알바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군대를 갓 제대한 젊은이, 아이들 학원비를 벌려던 주부처럼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도 이 유혹에 넘어갔다.
사람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악의 평범성을 극복할 수 있느냐는 사람과 동물의 구별점인 ‘생각하는 능력’을 제대로 쓰느냐의 여부에 달렸다.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자신의 행위가 정당한지에 대해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생각하는 능력’을 제대로 쓰지 않고 상부의 명령을 따랐다. 세 아이의 아버지는 어쩔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로 ‘생각하는 능력’을 덮었다.
하지만 ‘생각하는 능력’을 외면하는 개인만을 탓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우리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생존을 위해, 권력과 이권의 부스러기를 위해 ‘생각하는 능력’을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망각 된다면, 세 아이의 아빠처럼 개인의 일탈에만 그치지 않고 아이히만처럼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에 이제부터라도 국가는 국민 누구나 최소한의 기본생활이 가능한 소득을 보장해서 개인이 ‘생각하는 능력’을 외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부정한 권력과 이권이 발붙이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어 권력과 이권을 위해 함부로 ‘생각하는 능력’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해야 된다.
우리 모두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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