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 2층. 이곳엔 두 평 남짓의 작은 빈소가 있다. 장례를 치를 가족과 지인이 없는 무연고자 사망자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저소득층 시민 등을 위한 ‘공영장례식’이 열리는 공간이다. 빈소 밖에 있는 표지에서는 공영장례에 대해 “고인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도록 공공이 배려하여 사회적 애도를 표하는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공영장례식에는 고인의 외로운 생애를 함께하진 못했지만, 죽음마저 쓸쓸하지는 않길 바라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비영리단체 ‘나눔과나눔’과 상조회사 ‘해피엔딩’, 종교단체 봉사자, 시민 봉사자, 일반 시민 등 고인의 마지막을 동행하기 위해 공영장례식에 참여하는 이는 다양하다.
빈소 한쪽에는 방문객들이 고인을 향한 마음을 적어 걸어둘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생전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삶 마지막을 배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도의 마음이 빼곡히 담긴 쪽지들이 미풍에 한들거렸다.

“서울 하늘 아래 함께 했던 한명욱(가명)님을 기억하겠습니다. 어디선가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님의 가시는 길에 국화 한 송이를 바칩니다.”
국민일보는 지난달 23일 조인수(61·가명)씨, 류정환(66·가명)씨의 공영장례식이 열리는 서울시립승화원을 찾아 이들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했다. 이날 장례식에는 국민일보 기자들과 나눔과나눔 활동가 ‘그루잠’, 상조회사 해피엔딩 직원 A씨, 자원봉사자 B 목사가 참여했다.
"장례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상주가 돼 주시겠습니까?"
조인수 씨와 류정환 씨의 장례는 오후 1시부터 시작됐다.
서울 영등포구에 살던 조인수씨는 지난 14일 간경화로 인한 패혈증으로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드물게도 장례를 치를 유가족과 지인이 전혀 없는 ‘무연고자’였기 때문에 공영장례 대상이 됐다.
류정환씨는 서울 종로구에서 살다가 지난달 30일 심부전으로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류씨는 연고자가 있었지만, 장례를 치르기 위해 지자체에서 보낸 등기에 답신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 경우 연고자가 장례를 ‘기피’한 것으로 여겨져 공영장례를 치르게 된다.

조씨와 류씨는 본래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날 두 사람의 위패는 정성스레 꾸며진 제단 위에 나란히 놓였다. 사과, 배, 대추, 나물, 조기 등이 제기에 담겼고 헌화할 국화꽃도 가지런히 자리했다.
“지금부터 조인수 님과 류정환 님의 장례식을 진행하겠습니다. 기자님께서 두 분의 상주가 돼 주시겠습니까?”
‘그루잠’ 측의 요청으로 기자가 즉석에서 상주가 되어 장례식에 참여했다. 고인에 혹여라도 누가 될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제단 앞에 서자 장례가 시작됐다.
연고자가 아닌 사람들도 참여하는 만큼, 공영장례는 고인의 삶과 죽음을 소개하는 절차로 시작된다. 이날도 그루잠은 고인의 이름과 출생연도, 사망 사유 등을 읊은 뒤 잠시간 묵념했다. 기자도 함께 눈을 감고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승의 삶이 어떠했든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고 평안하기를, 평화롭고 외롭지 않은 곳에서 편히 쉴 수 있기를.
이어 식사와 술잔을 올리고 재배까지 드리자 그루잠이 축문을 낭독했다.
“아무리 슬퍼도 헤어져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외롭고 힘들었을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영원히 가시는 길이 아쉬워 이렇게 술 한 잔 올려드렸습니다. 잠시 후면 장지로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으나 고이 길 떠나소서.”
고인이 밥 한술 뜨기를 기다렸다가 헌화했다. 두 손으로 받쳐 든 국화꽃을 위패 가운데에 조심히 얹었다. 마지막으로 목사가 기도문을 읊으면서 빈소에서의 예식이 모두 마무리됐다.

위패를 모시고 운구까지 마친 뒤, 다시 빈소로 돌아왔다. 화장이 진행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장례를 진행한 그루잠과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좋은 일’이요? 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해요”
[나눔과나눔 그루잠 인터뷰]
[나눔과나눔 그루잠 인터뷰]
-나눔과나눔은 어떻게 만들어진 단체인가.
“나눔과나눔은 2011년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상임이사님이 제기를 직접 들고 다녀야 했고, 장례 장소도 그때그때 장례식장에 사정해 가며 빌렸다고 했다. 이후 연고자가 없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장례 대상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서울시와 함께 공영장례를 진행하게 된 것은 2018년부터다. 그러나 서울시로부터 별도의 지원금을 받지는 않고 있고, 오로지 후원금만으로 운영된다.”
-왜 ‘나눔과나눔’에서 일하게 됐나.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취업 준비를 하던 차에 나눔과나눔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일하다 보면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당연히 해야 할 일’에 가깝다.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시민을 위한 당연한 복지로서 공영장례식이 존재해야 한다.”
-지난해 서울시에서만 665명의 공영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례가 있나.
“모든 죽음이 기억에 남는다. (잠시 생각하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의 장례를 치른 적이 있다. 고시원에서 목을 매 죽음을 택하신 분이었다. 기록을 살펴보니 돌아가시기 전날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의사 진단서에는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는 8시간 비행이 가능한 상태’라는 소견이 적혀 있었다. 그건 그분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질문했다는 의미다. 그 서류를 받아보고 며칠 동안 마음이 복잡했다. 시한부 진단을 받은 뒤 극단적 선택을 할 때까지 그분이 어떤 고민을 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이주노동자분들은 대부분 혼자 한국에 와서 고향의 가족들에게 돈을 보낸다. 가족을 부양하려 한국에 왔다가 병을 얻어 돌아가기가 망설여졌을 것이다.”
-공영장례가 왜 중요한가.
“예전에 상임이사님께서 고등학교에서 강연하던 중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사람은 죽기 전에 누군가 자기 장례를 치러줄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았을 텐데, 왜 장례를 해줘야 하나. 그 돈으로 살아있는 사람들 복지를 늘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어느 날 불현듯 친구의 오래된 부고 소식을 듣게 됐다고 상상해 보자. 연고자와 연락이 닿지 않는 바람에 친구가 장례식도 못 치르고 죽었다면 분명 절망스러울 것이다.
또한 내가 죽은 뒤 누군가 나의 죽음을 애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살아가는 데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 상임이사님께서 쪽방촌에 혼자 사시는 분이 벽면에 이사님의 이름과 번호를 크게 적어놓은 걸 발견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집주인에게 ‘나 죽으면 저기로 전화해달라. 그럼 장례 치러 줄 거다’라고 당부해놓았다더라. 이런 의미에서 공영장례가 꼭 필요하다.”
- 나눔과나눔의 향후 계획은.
“나눔과나눔은 30년간 활동하고 그 후에는 소멸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그에 맞춰 나눔과나눔이 맡은 업무를 계속 서울시 쪽으로 나누고 있다. 최종적으로는 나눔과나눔 없이도 공영장례가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한다.”
산 자들은 여생을 짊어지러 돌아간다
대화를 나누던 중 화장이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60년 이상 살아온 육신을 재로 만드는 시간은 고작 1시간 남짓에 불과했다. 봉안을 위해 1층으로 내려가 유골함을 받아 들고, 분향대가 있는 ‘유택동산’으로 향했다.

분향대 앞에 고인의 위패와 유골함을 두고, 미리 준비해온 카네이션 꽃을 헌화했다. 고인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태워 꽃 위에 두고, 마지막으로 깊게 묵례했다. 유골은 분향대에 부어졌다.
고인의 유골이 담겼던 나무 유골함을 유택동산 옆 수거함에 넣으니 장례 절차가 완전히 끝이 났다. 산 자들이 돌아서 여생을 짊어질 차례였다. 그루잠은 기자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승화원에 사는 검은 고양이에게 밥을 주러 갔다. 기자도 사무실 복귀를 위해 승화원을 나섰다.
[人턴]은 스쳐지나가는 일상에서 포착한 ‘낯선 현장’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코너입니다. 돌아볼 때 일상은 다르게 보이고, 때론 이 낯섦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듭니다. 국민일보 기자(人)들이 시선을 돌려(turn) 익숙하지만 낯선 현장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승연 인턴기자
정인화 인턴기자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