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한 주택에서 박모(당시 13)양의 시신이 발견됐다. 전국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또 벌어졌다고 연일 들썩였다. 하지만 경찰은 모방범죄로 결론냈다. 수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논이나 야산이 아닌 집에서 살해됐고 옷가지로 피해자를 결박하지도 않았다는 이유다. 진범으로 지목된 인물은 윤모(52)씨였다. 사건 발생 이듬해 7월 검거돼 같은 해 10월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항소했지만 2심과 3심에서 기각됐다. 그는 20년간 옥살이하다 2009년 가석방됐다.

검거 당시 윤씨는 22세였다. 그는 “내가 박양을 죽였다”는 자필 진술서를 3번 썼다. A4용지로 10장 분량이다. (보관된 진술서는 총 4건이지만 이중 1건은 경찰이 대필했다.) 국민일보가 입수한 윤씨의 진술서를 보면 그는 1989년 7월 25일 경찰에 검거되고 이튿날인 26일부터 진술서를 썼다. 이날 2번, 이튿날인 27일에 1번 더 썼다. 화성 8차 사건 항소심 판결문에 윤씨가 체포된 지 4시간40분 만에 자백했다고 명시된 것으로 미뤄보면 26일 오전 5시40분 경부터 진술서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맞춤법도 모르는데… 한자어로 쓴 수상한 진술서
윤씨는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지 못했다. 경제적 이유 등으로 3학년때 자퇴했다. 진술서에는 틀린 맞춤법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를 ‘그렌데’로, ‘닦았다’를 ‘딱았다’로, ‘습니다’를 ‘씀니다’로, ‘밖’을 ‘빡’이라고 썼다.
그는 범행 전 상황에 대해 ‘1988년 9월 15일 낮 일을 끝내고 나니 10시 손발 딱고 나니 12시에 빡가덴 산책을 나가다 그렌데 마이 울쩍해서 동네을 왔다갔다 보니 슬레바 신고 산타는 검정색 긴팔에 바지는 청바지를 입버씀니다’라고 적었다.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윤씨의 진술서 중간 중간 한자어가 보였다. 지적 수준을 감안했을 때 그가 직접 구사했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문장도 많았다.
그가 26일 쓴 진술서에는 ‘주거지에서 경운기사로 일을 하기 시작해서’ ‘○○국민학교 후문 방향에서 ○○고개 거쳐 걸어가면서’ ‘잠시 멈추고 발길을 다시 돌렸다’ ‘피해자 집을 알게 돼’ ‘피해자 방을 서성거리다’라고 적혀있다.
27일 쓴 진술서에는 ‘하루 일을 하다 보니’ ‘휴식을 취하고 보니’ ‘왼쪽 손으로 입을 막고 오른 손으로 목을 졸랐다’ 같은 문장도 있다. 특히 ‘~하다 보니’ ‘~를 거쳐’ 같은 말은 윤씨가 지금까지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말이라고 했다.

범행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장은 앞뒤가 잘 맞지 않았다. ‘그렌데’ 같은 접속사도 많았다. 하지만 범행 동기나 범행 당시를 서술할 때는 문장이 비교적 매끄러웠다.
범행 상황과 크게 관련이 없는 문장을 쓸 때는 ‘하루 일을 하다 보니 ○○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사람을 좋다고 한다. 그렌데 나는 어저지 마음이 을쩍다. 사람들을 나보고 ○○가다고 하다. 그레서 그날은 어저지 일하 기분 안 좋고 그런데 사장이 와서 그런거 가지고 남자놈이 그러면 안돼다고 해서 할 수 업시 일을 다시 했다’ 같은 식이었다.
하지만 범행 상황을 적을 때는 ‘맨발로 책장을 넘고 들어가 오른 손으로 목 누르고 왼쪽 손으로 입을 막고 옷을 벗기고 (중략) 이불을 덥어주었씀니다. 문고리을 다시 잠고 신발을 양쪽 손에 들고 뛰어가다 중간에 쓰레기장에서 팬티를 불태어씀니다. 라이타로 불태어씀니다’라고 썼다.
범행 내용이 담긴 문장이 상대적으로 읽기 수월했다. 특히 범행 상황을 적은 부분은 서술어가 뒤죽박죽이었다. ‘정확한 시가는 알 수가 없다’고 썼다가 바로 다음 문장에는 ‘사이로 넘어가씀니다’라고 썼다.
윤씨 측 박준영 변호사는 “누군가 불러준 내용을 그대로 받아 적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며 “자필 진술서는 당시 유죄의 근거가 됐지만 이제는 강압수사와 허위자백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진술서 작성과정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경찰이 사건 관련 정보를 불러주거나 보여줘 탄생한 증거라는 사실은 진술서의 형식·문구·내용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씨 역시 자신의 글씨체는 맞지만 경찰이 불러주는 대로 써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정말 윤씨 스스로 쓴 진술서 맞나
형식 뿐아니라 내용 자체도 윤씨의 상황과 맞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그는 신체적 특징상 10분 이상 걷지 못한다. 하지만 진술서에는 윤씨가 사건 현장까지 ‘걸어서’ 갔다고 쓰여있다.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돌아오는 길에는 ‘피가 묻은 속옷을 태웠다’고도 했으니 1시간은 더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잘 걷지 못하는 윤씨는 진술서에 여러 번 ‘담을 넘었다’고 썼다. 특히 27일 진술서에는 ‘담을 넘을 때 먼저 손을 집고 오른 발을 먼저 올려놓고 다음 한 쪽 손을 담을 잡고 한 쪽 손으로 왼쪽 발을 올리다. 두 발을 다 올린 다음 담 반대 부분을 넘어’ 라고 적혀있다. 경찰은 “윤씨가 다리가 불편하긴 했지만 팔 힘이 좋아 담을 넘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현장 검증 당시에도 실제로 담을 훌쩍 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씨는 당시 담을 넘는 시늉만 했다고 반박했다. 윤씨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상태로 걸을 때마다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려 기우뚱거렸다. 그를 아는 이들은 “걷긴 걸었어도 뛰지는 못한다”고 입을 모았다.
진술서에 명시된 범행장소까지 가는 길 역시 윤씨 주장과 배치된다. 이곳에는 갈림길이 존재하는데 진술서 속에서 윤씨가 걸어간 길은 평소에는 전혀 이용하지 않는 곳이라는 주장이다. 윤씨의 지인은 “윤씨는 평소 진술서에 적힌 길로는 다니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현장검증 당시에도 윤씨는 진술서에 적힌 길 반대편 길로 다닌다고 말했었다.

대필 자술서도 있었다… 경찰 “대필 맞지만 사건과 무관”
경기남부경찰성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본부는 경찰에 보관된 윤씨 자술서 총 4건 중 1건은 대필로 확인됐다고 3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대필로 확인된 1건은 다른 탐문대상자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윤씨를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한 내용이다. 경찰서에서 작성한 것인지, 윤씨 집에서 작성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8차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박 변호사는 “윤씨가 글을 못 쓴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며 “나머지 자술서 역시 신빙성에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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