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베트남 여성 도안티흐엉은 “이번 사건이 한국의 몰래카메라 방송인 줄 알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31일 말레이시아 사법 관계자로부터 흐엉의 진술이 담긴 11장의 조서를 입수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흐엉은 8시간에 걸친 조사에서 자신은 “여배우”라며 김정남이 “고용된 배우인 줄 알았다”는 식으로 진술했다고 한다.
진술서에 따르면 흐엉은 2016년 12월쯤 베트남 하노이의 한 바에서 한국 남성, 미스터 Y를 만났다. 유창한 베트남어를 구사했던 Y는 흐엉에게 “내가 한국에서 작은 미디어 회사를 운영한다”며 “유튜브에 올릴 몰카프로그램을 찍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흐엉에게 출연 제의를 하며 희망 연봉까지 물어봤다.
Y는 흐엉에게 촬영 시나리오도 건넸다. 첫 대본에는 낯선 행인에게 말을 건 뒤 갑자기 뺨에 키스하는 상황이 묘사돼 있었다. Y는 사건 전에 비슷한 촬영을 몇 차례 진행하며 흐엉의 의심을 없앴다. 흐엉이 번번이 몰래카메라 촬영에 실패했지만 Y 일당은 출연료와 생활비를 지급했다.
김정남이 암살된 2017년 2월 13일을 전후해서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집중 예행연습이 이뤄졌다. 흐엉은 “Y가 지정한 중국인 남성의 등 뒤에서 양손을 뻗어 얼굴을 만진 적도 있었다. 서양 남성에게 화장품을 바르는 연습도 했다”고 진술했다.
Y는 사건 당일 흐엉에게 “오늘 매우 중요한 촬영을 한다”며 이날 찍은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흐엉은 “호텔 측으로부터 가위를 빌려 직접 머리를 손질하고 웨이브도 넣었다”면서 “예쁘게 화장까지 한 뒤 가슴에 ‘LOL(크게 웃는다는 뜻의 미국 속어)’이라고 적힌 상의도 입었다”고 말했다.
흐엉은 이날 Y가 몰래카메라 대상이 될 남성을 지정해줬다고 했다. Y는 흐엉에게 “재미있는 영상을 찍기 위해 고용한 남성 배우다. 키가 큰 편이고 검은 가방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흐엉은 지시대로 남성에게 다가가 Y가 준 오일을 얼굴에 발랐다. 흐엉은 “오일을 바른 손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유독성 물질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또 “Y가 이날 촬영 전 ‘다른 일정 때문에 당분간 연락이 힘들 것’이라고 말해 연락을 자제했다”며 “하지만 이틀 뒤 연락이 아예 끊겼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정남은 당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 제2청사에서 마카오행 비행기에 탑승하려다 변을 당했다. 얼굴에 통증이 와 공항 의료실을 찾았으나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김정남을 피습한 흐엉과 또 다른 여성 시티 아이샤는 현장에서 택시를 타고 도주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각각 사건 발생 사흘과 나흘 뒤 흐엉과 아이샤를 차례로 검거했다.
이들이 범행에 사용한 오일은 화학무기에도 사용되는 신경작용제 ‘VX’인 것으로 밝혀졌다. VX는 같은 신경성 독가스인 ‘사린’보다 100배 이상의 독성을 발휘한다.
말레이시아 수사 당국은 흐엉이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살해 계획을 사전에 전달받았으며, 확실한 의도를 갖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흐엉에 대한 재판은 1일 속행될 예정이다. 아이샤는 지난 11일 돌연 석방됐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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