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유랑 방송사 프리랜서들 “이젠 쉴 둥지 생겼어요”

Է:2018-06-26 20:04
:2018-06-26 20:09
ϱ
ũ

상암동에 국내 첫 미디어노동자 쉼터 ‘休서울…’ 문 열어

지난 21일 오후 서울 상암동 DMC에 위치한 ‘휴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를 찾은 이들이 테이블에 앉아 얘기하고 있다. 미디어노동자쉼터의 중심 공간인 라운지는 카페처럼 누구나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꾸며졌다. 10여개의 테이블이 놓여져 있고, 창가 쪽으로는 혼자 앉아서 일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돼 있다. 최종학 선임기자

Y씨는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작가다. 새벽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방송이 끝나면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면서 원고를 쓰고 회의도 한다. 방송국 안에는 Y씨가 일할 공간이 없다. 그가 프리랜서 작가이기 때문이다.

“회사 안에 작가실이란 게 없어요. 우리가 회의를 하거나 모임을 할 곳도 없고. 그러니까 늘 카페를 찾아 유랑하는 거죠.”

Y씨가 일하는 방송국에만 89명의 방송작가가 있다. 전부 프리랜서다. 그는 “한 방송국마다 방송작가가 100명쯤 있다고 보면 된다”며 “상암동 DMC(디지털미디어시티)에 방송작가만 1000여명 돌아다니는 셈”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프리랜서가 가장 많은 게 방송계이고, 방송작가는 대표적인 프리랜서 업종으로 꼽힌다. 이들의 근무 형태는 ‘재택’으로 처리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 집에서 일하는 경우는 드물다. 방송에도 참여하고 회의도 해야 한다. 그래서 방송국 주변 카페를 돌아다니며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프리랜서가 근무시간이 길어요. 중간 중간 쉴 곳이 필요한데 어디 갈 곳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매일 카페를 가는 거죠. 방송국에서는 일터(사무실)도 안 만들어주는데 쉼터를 만들어주겠어요?”

휴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 내 여성전용휴게실을 찾은 이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여성전용휴게실은 여성 비율이 높고 밤샘 작업이 많은 방송사 프리랜서들의 특성을 고려한 공간으로 여성들이 잠깐 눕거나 눈을 붙일 수 있다. 오른쪽은 회의실 모습이다. 최종학 선임기자

Y씨는 얼마 전부터 서울 상암동 DMC산학협력센터 6층에 위치한 ‘휴(休)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방송사 비정규직과 프리랜서를 위해 마련된 국내 유일의 쉼터다.

“쉼터가 생기니까 너무 좋죠. 거기서 집중해서 원고도 쓰고 회의도 해요. 작가들 모임도 하고. 공간이 넓은데다 카페처럼 분위기가 환해서 한 번 와본 작가들은 자주 오죠. 저도 이틀에 한 번은 가는 것 같아요.”

방송사 프리랜서 위한 국내 첫 쉼터

상암동 DMC에는 방송사들이 밀집돼 있다. 지상파와 케이블, 종합편성채널 등 방송사를 포함해 100여개의 미디어기업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동네 한편에 미디어노동자쉼터가 있다.

지난 21일 오후 찾아간 쉼터에는 10여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노트북을 켜놓고 뭔가를 쓰는 사람이 2명,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회의실 안에서 회의를 하는 팀 등이 보였다. 서울시 노동정책과 이재화 권익개선팀장은 “쉼터가 문을 연 지 이제 겨우 3주가 지났다”면서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하루 평균 20명 정도가 찾아온다”고 말했다.

250㎡(75평) 크기의 쉼터는 8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 라운지를 중심에 놓고 회의실 1개, 사무실 2개, 여성전용휴게실 2개, 상담실 1개를 주변으로 배치한 구조다. 라운지는 카페처럼 꾸며놓았다. 아무 자리나 잡고 앉으면 된다.

여성전용휴게실에는 여성들이 잠깐 눈을 붙일 수 있도록 침대와 1인용 쇼파의 일종인 빈백을 여러 개 구비해 놓았다. 여성 비율이 높고 밤샘 작업이 많은 방송사 프리랜서들의 특성을 반영했다고 한다. 쉼터에는 TV와 컴퓨터, 복사기가 갖춰져 있고 커피 등 간단한 간식도 제공한다.

사각지대에 놓인 프리랜서 노동

방송산업은 사실 프리랜서와 비정규직들이 떠받치고 있다. 방송작가, 외주PD, 프리랜서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컴퓨터그래픽(CG), 자막, 카메라,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프리랜서가 참여한다. 한국전파진흥협회의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업계의 절반에 가까운 43.3%가 프리랜서로 추정된다. 그러나 방송사 프리랜서의 정확한 현황을 조사한 자료는 아직 없다.

방송사 프리랜서의 노동조건은 가끔 사고를 통해 드러날 뿐이다. 이들은 장시간노동과 저임금, 차별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동안 소리를 내지 못했다. 노조를 만들 줄도 몰랐고 법의 보호를 받지도 못했다. 노동 사각지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쉼터에서 만난 방송작가 H씨는 “프리랜서는 근로계약서도 없이 구두계약만 하고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서 “작가들 중에는 근로계약서가 뭔지 노조가 뭔지 하다못해 연차가 뭔지도 모르는 이들도 많다”고 전했다.

미디어노동자쉼터는 방송사 프리랜서를 ‘미디어 노동자’로 발견하고 ‘프리랜서 노동’을 보호하기 위한 공공 차원의 첫 지원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울시가 공간을 제공하고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운영비를 댄다. 휴서울미디어노동자쉼터는 서울시가 사각지대 노동자들을 위해 만든 쉼터로는 네 번째다. 서울시는 퀵서비스기사나 대리운전기사들을 ‘이동노동자’로 명명하고 이들이 일하면서 잠시 쉴 수 있는 ‘휴서울이동노동자쉼터’를 도심에 3곳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

한빛센터 탁종열 소장은 “서울시가 방송사에서 일하는 비정규직과 프리랜서들의 문제를 알고 공간을 마련해줬다”면서 “일단 공간이 생기니까 사람들이 모이고 여기서 프리랜서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들을 전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한빛센터는 고 이한빛 PD의 유지를 잇기 위해 유족들이 출연해 만든 비정규직 미디어노동자 지원 단체다. 한 케이블방송의 예능PD로 일하던 이 PD는 방송제작 현장의 부당한 노동환경을 고발하며 만26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빛센터는 미디어노동자쉼터에서 노무 상담과 노동권 교육, 노조 조직 지원 등을 담당한다.

쉼터 넘어 프리랜서 지원기관으로

이날 쉼터에는 한 방송사에서 프리랜서와 파견용역직 노조를 발족시킨 L씨가 와서 조합원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노조 사무실이 없다”며 “여기서 조합원 가입도 받고 노조회의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안정적인 공간을 갖게 된 것이 노조 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며 “쉼터에서는 노조 운영과 관련한 자문도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회의실 안에는 MBC에서 해고된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이날 한빛센터 주선으로 언론시민단체 대표와 면담을 가졌다. 면담을 마친 한 여성 아나운서는 “2016년, 2017년 계약직으로 입사한 아나운서 10명이 최근 해고를 당했는데 어떻게 대응해야 될지 몰라 우리들끼리 애만 태우고 있었다”면서 “쉼터가 생겼다는 걸 알고 여기서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모일 곳이 있고 우리 얘기를 들어주고 도와주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면서 “상담이나 조언을 받고 있지만 여기서 법률적 지원도 원스톱으로 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방송사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아무 때나 와서 쉬고 일할 수 있는 공간 하나 마련해주자는 취지로 시작된 미디어노동자쉼터는 권익 침해를 받은 프리랜서들이 상담하는 공간, 프리랜서 노동조합들이 만들어지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서울시는 이용 현황을 점검해 주중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되는 현재의 쉼터 운영시간을 야간으로 연장할 예정이다. 전담 노무사를 배치할 계획도 갖고 있다.

28일 점심시간에는 쉼터에서 ‘런치 노동법 강의’가 처음 열린다. 프리랜서들에게 필요한 노동법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바쁜 프리랜서들을 위해 점심시간에 강의를 마련했고, 샌드위치도 제공한다. 쉼터는 앞으로 매월 점심시간을 이용한 노동법 강의를 열 계획이다. 8월부터는 프리랜서를 위한 심리 치유 프로그램도 시작한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
Ŭ! ̳?
Ϻ IJ о
õ
Ϻ 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