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꾸벅꾸벅 졸다 유리창에 머리를 찧고서야 눈을 떴다.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넘고 있었다. 출발한 지 벌써 3시간30분이 넘었다. 한 번도 펴지 못한 다리가 저려왔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너무 급했다. 생수 한 병을 다 마신 게 실책이었다.
서울을 오가는 버스 중 노선이 가장 긴 706번은 종점에서 출발해 다시 돌아올 때까지 100㎞를 달린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 차고지를 기점으로 일산경찰서 백석역 원당역을 지나고, 통일로를 통해 서울로 들어선 뒤 구파발 연신내 불광 독립문 서대문을 거쳐 서울역에서 회차한다.
최소 4시간30분, 보통 5시간이 걸리는 길을 706번 기사들은 하루 두 번씩 운행하고 있다. 10년째 이 버스를 몰고 있다는 김모 기사는 찬물을 종이컵에 3분의 1 정도 따라 한 모금씩 마시며 갈증을 달랬다. 화장실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묻자 새삼스럽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알아서 조절해야지.”

차고지엔 ‘무사고 1일’ 표지판… 오토바이 피해 다녀
지난 18일 오전 10시 30분 도착한 경기도 파주 신성교하차고지는 나즈막한 산 아래 온통 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서울도 아니고 도심은 더더욱 아닌 이곳이 서울 시내버스 706번의 ‘집’이다. 단층으로 지은 사무실 외벽에는 ‘706번 무사고 1일째’라는 팻말이 당당히 걸려 있었다. 파라솔 아래에서 쉬던 김 기사에게 ‘무사고 1일’의 경위를 물었더니 “몇 달씩 무사고이기도 한데 어제 작은 사고가 있었나 보네”라고 했다.
오전 11시 김씨가 버스에 시동을 걸었다. 손에 땀이 나면 운전할 때 실수가 생긴다며 미끄러짐 방지용 고무가 달린 흰색 장갑을 꼈다. 왕복 2차로 시골길을 지나며 그는 “오토바이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도 구간은 하다못해 중국집 배달 아저씨도 별로 없는데 서울에만 진입하면 언제 오토바이가 튀어나올지 몰라서 위험해. 정신 똑바로 차려야 사고 안 나.”
그의 말대로 낮 12시45분쯤 버스가 서울 은평구에 진입하자마자 오토바이 두 대가 바짝 붙어 스치듯 지나갔다. 2시간 가까이 경기도 구간을 지나올 때 딱 2번 울린 경음기가 서울에선 30분 만에 4번이나 울렸다. 한 번은 불법 유턴하는 승용차 때문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오토바이가 원인이었다. 음식배달 오토바이와 퀵서비스 오토바이가 시도 때도 없이 버스를 추월했다. 좁은 골목이나 차량 사이에서 뜬금없이 튀어 나오기도 했다. 김씨는 “그나마 버스중앙차로를 달릴 때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여기가 설악산이다 생각”… 각양각색 졸음방지책
김씨에게는 일산이 설악산이고 파주가 경포대다. 사시사철 피고 지는 나뭇잎과 꽃을 바라보면 지루할 새 없이 즐겁게 운전할 수 있단다. 특히 일산 뉴코아 앞 가로수길을 좋아했다. “7월에는 여기가 파랬는데 지금은 노랗게 물들어가니까. 내 기분에 따라서 ‘여기가 설악산이구나’ 하면 설악산인 거야. 뉴코아에서 좌회전하면 단풍이 얼마나 예쁜데.” 파주 운정호수도 그에게는 절경이다. “호수 지나갈 때면 ‘내가 옛날에 다니던 경포호수랑 비슷하네’ 생각하고 그래.” 김씨는 사소한 풍경에서 변화를 느끼는 게 오래 운전할 수 있는 비법인 듯 말했다.
그래도 졸음이 몰려올까 싶어 그는 종일 껌을 씹었다. 틈틈이 파란 비닐 껍질을 까서 박하사탕도 입에 넣었다. 화장실에 가기 힘든 만큼 커피는 입에 대지 않았고 물도 최대한 자제했다. 속수무책으로 잠이 쏟아질 땐 종이컵에 찬물을 따라 ‘눈알’을 씻는다고 했다. 이것조차 먹히지 않아 냉수를 그냥 목덜미에 끼얹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출발한 지 2시간이 넘어가자 그는 눈에 띄게 스트레칭을 자주 했다. 손깍지를 한 채 기지개를 켰고 허리를 좌우로 돌렸다. 좀이 쑤신 나머지 버스기사를 따라 스트레칭을 해봤다.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것 같다.

대리기사 ‘웃고’ 취객 ‘우는’ 버스
706번 노선이 이렇게 길어진 건 신도시 개발 때문이다. 1993년 경기도 파주와 서울역을 잇는 907번 버스로 개통된 이 노선은 2004년 706번 버스로 전환됐다. 2011년 파주 운정신도시가 생겨나면서 파주시 요청으로 노선이 연장됐다. 이후 운정 3지구 개발로 차고지가 더 북쪽으로 옮겨져 결국 노선 길이가 왕복 100㎞에 달하게 됐다.
의도치 않게 노선이 길어지면서 706번은 대리운전기사 사이에서 ‘셔틀버스’라고 불린다. 막차가 오전 2시15분까지 있는 데다 서울역, 불광역, 연신내, 일산 등 술집이 많은 곳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김씨는 대리기사를 “마음이 쓰이면서도 조심해야 할 손님”으로 꼽았다. 김씨는 “대리기사들이 밥벌이하는 데 이 버스가 큰 도움이 된다”면서도 “그런데 대리기사들이 간혹 정류장에 안 섰다고 신고하는 때가 있다. 그러면 ‘사람이 없었는데 뭔 소리냐’고 해명하러 다녀야 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노선이 길다 보니 잠이 든 취객도 문제다. 졸다가 종점에서 깬 손님은 내려야 할 곳을 너무 많이 지나와 깜짝 놀라곤 한다. 파주 차고지에서 서울시 경계선까지만 해도 거리가 35.3㎞나 된다.
어려운 노선이다 보니 아무나 706번을 버스를 몰 수는 없다. 까다로운 경력조회를 거친 뒤 노선을 배정받는다. 서울시에 등록된 버스이지만, 운전 경력이 오래된 경기 지역 버스기사 중에서 ‘괜찮은 사람’을 추천받아 뽑는 경우도 있다. 김씨는 “같은 운전을 해도 모범적으로 잘하는 사람들이 뽑힌다. 운전할 줄 안다고 막 들어오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밥 먹고 가스 넣고… 쉴 틈 없어
오전 11시 출발한 706번 버스는 오후 4시가 돼서야 다시 차고지로 돌아왔다. 5시간 만에 무릎을 펴고 일어서니 순간 현기증이 났다.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갔다. 버스기사는 수북이 쌓인 사탕껍질과 손님들이 버린 쓰레기를 치웠다. 차고지 서쪽 장명산 뒤로 해가 뉘엿이 기울고 있었다.
장거리 운전을 마쳤지만 김 기사는 충분히 쉴 수 없었다. 여객운수사업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4시간 이상 운전한 버스기사는 최소 30분은 쉬어야 한다. 하지만 차고지에 도착해 버스에 가스 넣고 구내식당에서 밥 먹고 하면 실제 휴식시간은 30분이 채 안 되기 일쑤다. 눈 내리는 겨울에는 1회 운행시간이 6시간을 넘어 도착하자마자 쉬지 못하고 바로 나가기도 한다.
서울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12일 장거리 버스 노선 분할·단축 계획을 발표했다. 706번은 파주에서 서울 불광역을 왕복하는 노선으로 짧아졌다. 노선 번호도 773번으로 바뀐다. 서울시 버스정책과 관계자는 “706번 노선을 11월 1일부터 단축하기 위해 버스회사와 실무적인 부분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짧아진 노선도 왕복 80㎞에 운행시간이 3시간40분이나 돼 여전히 길다. 이 때문에 노선 단축뿐 아니라 기사의 실질적 휴식을 보장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종일 버스를 운전한 김씨는 노선 단축 소식에 기뻐했다. 그는 “운행 횟수는 그대로인데 거리가 줄어들면 시간이 많아지고 편해지니 더 좋다”며 소리 내 웃었다. 그는 종이컵 가득 물을 따랐다. 자판기 앞에 버스기사 6~7명이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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