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일 오전 9시10분쯤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에 모습을 드러낸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예상했던 대로 사복 차림이었다. 파란 정장의 왼쪽 가슴에 ‘503’ 수인번호 배지가 붙어 있었다. 머리모양은 예상과 달랐다. 구치소는 철제 실핀 반입이 금지돼 있어 ‘올림머리’를 하는 게 어려울 것으로 보였지만, 올림머리와 비슷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플라스틱 핀 등을 사용해 고정시킨 듯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등 18가지 혐의를 받고 있다. 두 차례 공판준비기일을 거쳐 이날 첫 정식 재판이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 심리로 열렸다. 417호 대법정 피고인석에는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이들에게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기소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나란히 앉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 법정에 반드시 나와야 했다. 지난 2일과 16일 두 차례 공판준비기일은 대리인을 보내도 됐지만, 23일 재판부터는 피고인이 직접 출석해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의 신문에 응해야 한다. 지난 3월 31일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된 지 53일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40년 지기이자 공범 관계인 최순실씨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은 피고인석에 최씨와 나란히 앉았다. 하지만 재판이 시작될 때까지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둘은 나란히 앉았지만 시선은 모두 정면을 응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최씨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1998년 정치를 시작한 뒤 20년 가까이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늘 계산한 듯한 옷차림, 어머니를 따라한 올림머리, 마주한 이를 주눅 들게 한다는 ‘레이저 눈빛’….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데는 이렇게 ‘포장된’ 이미지의 힘이 컸다. 서울구치소에서 보낸 53일은 그동안 당연하게 해온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시기였다. 두 달에서 일주일이 부족한 이 시간은 그를 ‘초췌하게’ 바꿔놓았다.

◇ ‘나 홀로’ 탑승한 호송차
박 전 대통령은 23일 오전 8시37분쯤 호송차를 타고 서울구치소를 출발했다. 호송차에는 박 전 대통령과 교도관만 탑승했다. 지난 3월 검찰 출두 때와 달리 교통 통제가 이뤄지지 않았다. 호송차는 신호등에 걸리면 멈춰서고 정체 현상이 생긴 터널을 느리게 통과해 오전 9시10분쯤 서울법원청사에 도착했다.
호송차에서 내린 박 전 대통령은 수의가 아닌 파란색 정장 차림이었다. 구속영장이 발부 됐을 때와 같은 옷이었다. 손에 수갑을 찼고, 왼쪽 가슴에는 ‘503’ 수의 번호 배지가 붙었다. 정갈한 올림 머리는 아니었지만 흰색 머리핀을 이용해 머리를 고정했다. 양 볼은 상당히 야윈 모습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법원청사 지하 1층을 통해 곧장 재판이 열리는 417호 형사대법정 대기실로 이동했다. 약 50분간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뒤 법정 피고인석에 앉았다. 지금껏 최순실씨 등 수감자들은 재판을 받으러 올 때 식사를 검찰 구치감에서 해결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법원 지하 1층에 별도로 마련된 곳에서 구치소 측이 준비한 도시락을 먹을 것으로 알려졌다.

◇ 옷차림은 파란색 ‘전투복’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는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가거나 법정에 출두할 때 ‘수의(囚衣)’와 ‘사복’ 중 선택할 수 있다. ‘형 집행 및 수용자 처우에 관한 법률’ 제9장은 미결수가 수사·재판·국정감사 등 법률로 정하는 자리에 참석할 때 사복을 착용할 수 있도록 했다. 국정농단 사태로 줄줄이 법정에 서고 있는 피고인들도 옷차림은 제각각이다.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은 사복을 고집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법정에 나올 때마다 언론 카메라 세례를 받지만 수의 입은 모습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와이셔츠에 짙은 색 양복과 노타이 차림이다. 최순실씨 조카 장시호씨도 “어린 아들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이유로 사복을 입고 나온다.
안종범(59)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과 차은택(48)씨 등은 줄곧 수의를 입고 법정에 출석했다. 최순실씨는 헌법재판소 출석 때 사복을 입었지만 형사재판 때는 수의를 입었다. 지난달 17일 형사재판에선 수의 대신 사복 차림이었는데, 당시 법정 진술을 시작하며 “(재소자용) 동복이 덥고 그래서 사복을 입고 나왔다”고 말문을 열었었다.
국내 법정에서 미결수 사복 차림이 가능해진 뒤로 피고인의 ‘법정 패션’에 메시지가 담기기 시작했다. 사복을 허용한 취지부터 ‘판결 전에는 죄인이란 선입견을 갖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다. 구치소에 수감됐지만 무죄를 주장하는 이들은 통상 사복 차림을 선호한다. 김기춘 이재용 조윤선 피고인 등의 경우가 해당할 수 있다. 반면 수의를 입고 나오는 안종범 정호성 피고인 등은 혐의를 일부 인정한 상태다. 정치적 사건의 경우 ‘동정론’을 겨냥해 수의를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의 대신 사복을 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 2차례 공판준비기일에 박 전 대통령 측 변호인은 18가지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최씨가 삼성에서 뒷돈을 받는 등의 과정을 전혀 몰랐고, 삼성에서 경영권 승계 편의를 부탁받은 적도 없으며, 대기업에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을 직접 요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편다.
무죄를 강조해야 하는 터라 사복 차림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박 전 대통령의 ‘전투복 패션’으로 불리는 짙은 청색 옷이 유력해 보였고, 예상대로 파란 정장을 입었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돼 청와대에서 나올 때,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청에 출두할 때도 모두 남색 정장 재킷 차림이었다.

◇ 화장실서 직접 뽑았던 올림머리 ‘핀’…
지난 3월 31일 새벽 서울중앙지검 유치시설에서 대기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구속영장이 발부됐다는 소식을 듣고 화장실로 갔다. 직접 올림머리 고정에 쓴 머리핀을 뽑고 화장을 지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검찰 차량 뒷좌석 가운데 자리에 앉아 이동해 오전 4시45분 서울구치소로 들어갔다. 이 차에 앉아 있던 장면이 대중에 공개된 마지막 모습이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초췌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올림머리를 했다가 핀을 뽑아낸 터라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청와대에서 삼성동 자택으로 옮긴 뒤에도 매일 전속 미용사의 출장관리를 받으며 유지했던 ‘단정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구치소에는 철제 실핀 반입이 금지돼 이런 머리를 유지할 수 없다. 영치금으로 구치소에서 판매하는 플라스틱 머리핀과 머리끈을 구매할 순 있지만 미용사가 도와줘도 긴 시간이 소요되는 헤어스타일을 직접 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법원에 모습을 드러낸 박 전 대통령의 머리모양은 ‘올림머리’와 비슷한 형태였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해주는 흰 머리핀이 눈에 띄었다. 53일간 구치소 생활을 하며 나름의 머리 손질 방법을 발견한 듯하다. 조윤선 전 장관도 구속 직후 특검에 소환될 때는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이후 재판정에 나오는 일이 잦아지면서 차츰 외모도 안정을 찾아가는 변화를 보였다.
◇ 질의응답 꺼렸던 박 전 대통령, 피할 수 없는 '질문' 앞에 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을 찾아 기자들에게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지명 사실을 직접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간단한 발표입니다만, 헌법기관장인 헌법소장에 대한 인사여서 제가 예우상 기자실에서 직접 브리핑하게 됐다"면서 "혹시 질문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질문 있느냐"는 대통령의 느닷없는 '질문'에 일부 기자들은 "우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그만큼 '대통령의 질의응답'은 춘추관에서 드문 일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일문일답을 가장 적게 한 대통령 축에 든다. 춘추관을 찾을 때마다 발표만 하고 돌아서기 일쑤였고, 공식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받을 때도 춘추관 측이 사전에 기자들에게 조율을 요청하곤 했다.
탄핵심판 과정에서도 이런 스타일은 바뀌지 않았다. 직무 정지 기간에 느닷없이 기자들과 만났을 때도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헌법재판소 심판정에는 끝까지 출석하지 않았다. 심지어 탄핵심판 막바지에 "출석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히면서도 "반대신문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끝내 무산됐다.
형사 법정에선 이런 방식을 고수할 수 없다. 검찰 측은 아주 긴 리스트의 질문 목록을 만들어놨을 게 분명하다. 뇌물 재판의 특성상 당사자의 진술 한마디, 거기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까지도 판결에 중요한 영향을 주기에 검찰, 변호인, 재판부는 피고인과 증인들에게 많은 질문을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재임 4년간 공식석상에서 받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질문에 앞으로 최장 6개월간 이어질 재판에서 직접 답해야 한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겠지만 검찰 측은 그런 도움을 무력화하거나 우회할 질문을 숱하게 던질 것이다. 이런 '질의응답'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재판의 쟁점만큼이나 무게 있는 관전포인트가 됐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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